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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정 오지‘영양의 훌륭한 스토리텔링 ‘음식디미방’
[헤럴드경제(영양)=서병기 선임기자]경북 영양 하면 ‘고추’가 유명하다는 정도가 알려져 있다. 영양에 대해 조금 더 아는 사람은 매운맛이 강한 청양고추가 충남 청양이 아니라 경북 청송(靑松)과 영양(英陽)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더 이상 영양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하기란 영양을 가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영양에는 꽤 좋은 스토리텔링이 있다.

▶경북 영양의 훌륭한 스토리텔링 ‘음식디미방’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을 남긴 정부인 장계향(1598~1680)의 거처가 있는 곳이다. ‘좋은 음식 맛을 내는 방문(方文)’이라는 뜻을 담은 음식디미방은 340여년 전인 1670년께 영양 지방에 살았던 사대부가의 여인인 여중군자 장계향이 후손들을 위해 쓴 음식조리서다. 1600년대 조선, 경상도 지방의 가정에서 실제 만들었던 음식의 조리법과 저장 발효식품, 식품보관법 등 146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음식디미방 이전에도 음식에 관한 책이 있었지만 모두 한문으로 쓰였고 간략하게 소개하는 데 그쳤다.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여성이 쓴 조리서이자 한글로 된 최초의 조리서를 남긴 분이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우리 역사상 이름을 남긴 여성은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정도를 기억하는데, 장계향은 그다음에 이름을 올려도 될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장계향은 10명의 자녀를 훌륭히 키워냈으며, ‘학발시’등 시 9수를 남겼다. 맹호도와 산수화를 그린 화가였으며 뛰어난 서예가이기도 했다.


정부인 장씨를 알리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설가 이문열은 자신의 13대조 할머니이기도 한 장계향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선택’을 남기기도 했다. 영양군에서도 지난해 여중군자 장계향 정부표준영정(91호)을 지정했으며, 음식디미방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검정을 거쳐 올해에는 고등학교 기술·가정 통합교과서에 정식으로 오를 수 있도록 했다.

정부인 장씨가 어깨 너머 이어져온 어머니의 손맛을 한자 한자 마음으로 기록한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은 현재에도 그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 ‘레시피’대로 하고, 때로는 약간 응용하면 훌륭한 음식이 된다. 내용이 한글로 돼 있는 데다 음식 조리법과 조리기구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어 지금도 이 책을 따라 요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실용적이다.

일반 여행객도 장씨가 살던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두들마을에 가면 음식디미방에 있는 음식을 만드는 체험을 할 수 있고, 음식디미방 속의 옛날 요리를 7첩, 12첩 반상의 코스로 받아볼 수 있다. 가족과 함께하면 의미 있는 여행이 될 것이다. 

▶두들마을의 담백한 전통음식 체험

대구 껍질을 벗겨내고 그 속에 석이버섯ㆍ표고버섯ㆍ꿩고기를 잘게 다져넣고 삶은 대구껍질누르미, 석이버섯ㆍ표고버섯ㆍ꿩고기ㆍ잣을 다져 간장과 참기름에 볶아 소를 만들고 생선살을 얇게 저며 녹둣가루를 묻혀 만두처럼 쌂은 어만두, 돼지고기로 만든 가제육 등을 맛볼 수 있다. 섭산삼, 빈자법, 연근채, 동아누르미 등 생소한 우리 전통음식도 자극성이 적으면서도 맛이 살아 있다. 화학조미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음식들 대부분이 담백하고 개운했다. 튀기는 음식이 대부분인 고칼로리의 서양음식에 비해 찌거나 굽는 것이 많은 저칼로리의 웰빙음식이다.

기자는 두들마을의 음식체험관에서 만두를 만들어봤다. 돼지고기를 다져 소를 만들고 밀전병을 얇게 부쳐 만두피를 만들어 손으로 만두를 빚은 다음 꿩육수를 부었다. 만두 모양이 석류와 비슷해 ‘석류탕’이라 불렀다. 패스트푸드나 자극성 음식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이 먹으면 좋을 만하다. 은은한 식감이 기분을 좋게 한다. 


음식디미방은 우리의 과거 식생활을 이해하는 소중한 자료다. 옛 조리법을 발굴할 수 있는 지침서로도 가치가 높다. 전체 146항목 중 술 만드는 법이 감향주, 유화주, 백화주 등 51개 항목을 차지했다는 것은 당시 상류층 주부가 하는 일 중에 술빚기의 비중이 컸다는 방증이다. 손님을 접대할 일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또 복숭아, 가지, 생포 간수법을 보면 냉장고가 없던 시절 어떻게 음식을 보관했는지를 알 수 있다. 제철이 아닌 나물 쓰는 법을 통해 비닐하우스 재배와 유사한 방법으로 겨울철에도 야채와 과일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농사에 소가 귀하게 쓰이던 시절이라 개와 꿩이 쇠고기를 대신했음도 알 수 있다.

음식 양념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고추는 국내에는 지봉유설(1613년)에 처음 소개됐지만 60여년 후에 만들어진 음식디미방에는 고추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당시 이곳까지는 고추가 전파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매운맛을 내는 조미료로는 천초와 후추, 겨자 등을 사용했고, 마늘보다는 생강을 많이 썼다. 음식디미방에는 육류, 해산물, 채소를 활용한 ‘누르미’가 많이 나오는데, 밀가루를 입혀 지지는 누름적의 원형으로 보인다.


▶이문열의 문학 고향

두들마을에는 340년 전 반가음식을 지금 입맛에 맞도록 재현해낸 ‘건강음식의 메카’ 음식디미방 체험관, 음식디미방 교육관, 음식디미방 전시관, 정부인 장씨 유적비와 예절관 등이 있다. ‘언덕 위의 마을’이라는 뜻의 두들마을은 학문과 문학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질병을 치료하는 시설인 광제원이 있었던 곳이다.

조선 인조 18년(1640년) 장계향의 남편인 석계(石溪) 이시명 선생이 병자호란의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면서 재령 이씨 집성촌이 됐다.

마을 옆 둔덕에는 석계의 서당인 석천서당과 석계고택이 남아 있다. 석계고택은 일자형의 사랑채와 안채를 흙담으로 막아 허실감을 메워 ‘뜰집’ 같은 느낌이 들도록 했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화매천 가에는 서계 선생의 넷째아들인 이숭일이 새겼다는 동대, 서대, 낙기대, 세심대 등의 글씨가 아직 남아 있다. 30여채나 되는 전통가옥에서는 한옥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돼 있다. 호젓한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 두들광장 잔디밭에 서면 전망이 한눈에 들어온다. 겨울이라 찬바람이 불지만 너무 깨끗해 청량함을 느낄 수 있다.


이시명 선생의 직계인 이문열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을 이곳 두들마을에서 보냈다. 그의 소설 ‘선택’의 직접적인 배경이며, ‘그해 겨울’ ‘금시조’ ‘황제를 위하여’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에서도 인물들의 삶의 역정이 펼쳐졌던 무대로 그려졌다. 이문열은 요즘도 1주일에 한 번은 들러 문학지망생들과 대화를 나누곤 한다.

이곳에는 2001년 현대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문학도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광산문학연구소가 있다. 학사 6실, 강당 및 사랑채로 이뤄진 이곳에서는 수시로 문학강연과 문학토론회가 열린다. 그 옆에는 이문열 작가 등 문인들의 작품을 차를 마시면서 읽을 수 있는 북카페 두들책사랑도 있다. 


▶선바위와 남이포, 그리고 한국 3대 정원인 서석지

두들마을에만 있기가 답답하다면, 그리 멀지 않은 입안면 연당리에 있는 선바위내의 남이포와 남이정, 그리고 서석지를 둘러볼 만하다. 선바위는 영양을 지키는 장승인 듯, 신선바위인 듯 남이포 절벽 앞에 거대한 촛대처럼 우뚝 서 있다. 선바위는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쌍계입암’의 배경이기도 하다. 선바위에는 조선 초기 억울하게 요절한 남이(南怡) 장군의 유서 깊은 전설이 전해온다. 장군이 역모를 꾀하던 용의 아들들을 토벌한 자리라 한다. 어쨌든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담을 수 있으니 눈이 호강하는 곳이다. 영양의 자연을 고스란히 담은 선바위에서 남이포의 물가를 따라 남이정까지 산책하면 마음이 평안해질 것이다.

서석지(瑞石池)는 전남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부용원과 함께 한국의 3대 정원 중 하나다. 조선 광해군 때 석문 정영방이 조성한 정자와 연못이다. 자연과 인간의 합일사상을 토대로 만들었는데, 못 주위 사우단(四友壇)에는 매난국죽을 심어 선비의 지조를 담았다. 서석이라 칭한 것은 상서로운 모양의 연못 바위마다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 하나 수기치신에 집중한 선비의 풍류와 절개가 느껴진다. 서석지의 정원을 산책하며 겨울의 운치를 느껴봄직하다.


서병기 선임기자/w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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