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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크엔드] 6번째 올림픽…이규혁의 해피엔딩!
2010년 2월 16일 오전 5시47분. 밴쿠버의 아들은 한국에 있는 어머니에게 떨리는 손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엄마 나 준비됐어. 요번엔 정말 빈틈없이 준비했는데 막상 시간이 다가오니까 떨리네. 하지만 엄마가 있으니까, 할머니가 계시니까, 동생 규현이도 있으니까 가족을 위해서 최선을 다할 거야. 끝나고 통화해^^”

그리고 5시간 뒤. 그는 밴쿠버 올림픽오벌경기장에서 가슴으로 울고 있었다. 정빙 차량 고장으로 1시간이나 넘게 지연되는 스피드스케이팅 500m 1차 경기. 생애 최고의 레이스를 위해 한껏 달궈놓은 그의 몸은 이미 차갑게 식고 있었다. ‘힘들겠다’는 직감은 그대로 현실이 됐다. 500m 15위, 1000m 9위. 다섯 번째 올림픽도 결국 그를 외면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안 되는 걸 도전하는 게 정말 슬프다”고.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맏형’ 이규혁(36ㆍ서울시청)이 여섯 번째 올림픽을 준비한다. 이전 올림픽과는 차원이 다르다. 4년 전 흘렸던 자책의 눈물도 없고, 심장을 옥죄는 떨림도 없다. 후회도 미련도 없다. 마지막이라는 설렘과 후련함이 있을 뿐이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 한국선수단 기수의 영광도 안은 이규혁은 “늘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돌이켜 보면 마지막을 위한 준비는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번에는 메달과 상관없이 즐겁게 맞이하고 끝내고 싶다”고 했다.

이규혁은 10일(한국시간) 오후 10시 남자 500m와 12일 오후 11시 남자 1000m 레이스에 출전한다. 2007년과 2008년, 2010년과 2011년 세계스프린터선수권대회에서 네 차례나 정상에 올랐고 월드컵시리즈에서도 통산 14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올시즌 그는 월드컵에서 딱 한 번 디비전A(1부리그)를 밟는 데 그쳤다. 월드컵 1차 대회 1000m였고, 결과는 18위였다. 사실상 올림픽 메달권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국내 빙상계와 팬들은 물론 세계 빙상 관계자도 여섯 번째 올림픽 무대를 준비하는 이규혁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다. 스프린터로는 보기 드문 서른 중반의 나이에 또 다시 올림픽에 도전하는 그야말로 ‘올림픽 정신’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1960년대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출신 이익환 씨와 피겨스케이팅 ‘대모’ 이인숙 씨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빙상 신동’ 소리를 들었다. 1991년 열세 살에 성인 국가대표 태극마크를 단 그는 수없이 많은 한국신기록을 작성했고 1997년 1000m(1분10초42), 2001년 1500m(1분45초20) 세계기록도 수립했다. 승승장구하는 그에게 ‘실패’라는 단어를 가르쳐준 것은 다름아닌 올림픽 무대였다. 열여섯 살 때인 1994년 릴레함메르부터 1998년 나가노,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2006년 토리노, 2010년 올림픽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시상대에 오르지 못했다. 올림픽 직전 세계스프린터선수권에서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로 네 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기대를 모았던 밴쿠버 대회에서도 그는 또 한 번 ‘올림픽 징크스’에 발목이 잡혔다. 마지막 레이스인 1000m 경기 후 빙판에 벌러덩 드러누워 한동안 일어나지 못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하지만 당시 깜짝 금메달을 따낸 모태범과 이상화, 이승훈은 입을 모아 이규혁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20년간 한국 빙속을 이끌었던 이규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쾌거였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이규혁은 “어린 나이에 처음 출전한 릴레함메르 대회가 가장 재미있었고 나머지 올림픽은 어떻게 경쟁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패한 기억이 많다”며 “올림픽은 내게 ‘실패’를 알려줬지만, 여전히 나에게 올림픽은 ‘희망’ ”이라고 했다.

다섯 번의 워밍업을 마친 이규혁의 진짜 올림픽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조범자 기자/anju1015@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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