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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편의 소설이 나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대학교수 · 소설가 · 시인 50인이 선정한 ‘인생 최고의 소설’
창작의 세계로 이끈 소설 한 편
작가들이 밝힌 문학의 시원

삶과 소설의 경계를 더듬어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책


만약 당신이 내게 소설을 묻는다면 /장성수, 문순태 외 48명 지음 /소라주
“당시의 나를, 지금의 내가 진실로 고백하건대, 김승옥의 그 소설들이 아니었다면 철없이 나불대고 다닌 그 시절 나는 나의 자화상을 가늠이나 할 수 있었을지.”

김춘섭 전남대 명예교수는 소싯적 김승옥 작가의 소설에 매료됐지만 그 소설이 자신의 소설 쓰기를 멈추게 만들었음을 고백했다. 소설 쓰기를 멈춘 그는 이후 대학 강단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평론으로 필명을 날렸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김승옥의 소설은 분기점이었던 셈이다.

‘만약 당신이 내게 소설을 묻는다면’은 우한용 서울대 명예교수, 송하춘 고려대 명예교수, 정하영 이화여대 명예교수, 최시한 숙명여대 교수, 장성수 전북대 교수, 문순태 작가, 김병용 작가 등 오랜 세월 동안 문학을 연구한 대학교수와 작가 50명이 각자 자신을 문학의 세계를 이끈 소설을 한 편씩 선정해 에세이 형식으로 소개한 책이다.

소개되는 작품은 김만중의 ‘구운몽’부터 김연수의 ‘원더보이’까지 고전과 신간을 망라한다. 저자들은 소설에 대한 깊이 있는 해독을 하는 것은 물론, 독자들이 자칫 놓칠 수 있는 소설 속 미학을 자신들의 인생사와 엮어서 풀어내기도 한다.

작가를 작가로 만든 소설을 엿보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김용택 시인은 “오히려 소설의 숲에서 시를 꽃 피웠노라”고 고백하고, 문순태 작가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대한 애정 어린 서평을 남긴다. 정도상 작가는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를, 김병용 소설가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자신의 작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는다. 문신 시인은 이병천의 ‘저기 저 까마귀떼’를 수천 번 통독했다고 밝힌다.

“돌이켜 보건대, ‘설국’은 내게 ‘문학’ 혹은 ‘소설’을 향해 열린 첫 터널이었다. 처음에는 사물로서 ‘책’이었다가 독해해야 할 ‘텍스트’로, 그리고 ‘언어도단’ 너머 해석의 대상인 ‘콘텍스트’로, 그리고 마침내는 내가 통과해온 내 삶을 이해하는 거울로서 이 작품은 내 젊은 시절을 함께 해왔다.”(176쪽)

수많은 작품을 비평해온 평론가와 대학교수의 글들은 해당 소설의 가치를 새롭게 재조명한다는 점에 큰 가치를 가진다. 최시한 숙명여대 교수는 최명익의 단편소설 ‘심문’을 공간적 소설로 다시 읽는다. 임희종 문학평론가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안에 숨겨진 섬세한 문체를 집중 조명한다. 송명희 부경대 교수는 신경숙의 단편소설 ‘부석사’의 심층 구조가 상처를 치유하는 내면의 여정임을 서술한다. 임환모 전남대 교수는 이승우의 ‘에리직톤의 초상’에 담긴 인간 구원의 의미를 써내려간다.

“이를 테면 작가 최명희가 각고하여 얻으려는 것이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어도 풍화 마모되지 않는 모국어’인데, 작가는 그 ‘모국어의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는 새기는’ 아픔을 감내했다. 스스로 어리석음을 자책하면서도, 누군가 꼭 해야 하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그 일을, 간절한 심정으로 이십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감당했다.”(58~59쪽)

오랜 문학적 수련을 거친 저자들이 설명하는 소설의 안팎에 숨어 있는 시의성과 미학은 소설 읽기에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저자들의 체화된 문장으로 만나는 소설들은 익히 알고 있는 소설이더라도 신작처럼 새롭게 다가온다.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도 문학적인 느낌을 주는 저자들의 유려한 문장은 또 다른 읽기의 즐거움이다. 

이 책은 소설을 사랑하는 50명의 저자가, 소설을 사랑하는 독자들과 함께 나누는 선물이다. 한 영혼의 삶이 빚은 소설이 많
은 이들에게 어떤 감응을 불러일으키는지, 독자들은 이 책을 읽어가는 동안 새삼 깨닫게 된다.

대표 필진인 장성수 전북대 교수는 “이 책을 함께 쓴 이들은 모두 평생 문학을 삶의 나침반으로 삼아 각자 서로 길을 찾아 가던 사람들이, 우연찮게 큰 교차로에서 만난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이뤄졌다”며 “우리가 소설에 대해 생각해온 것,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들을 모아보는 것으로 우리는 21세기 초반 우리 당대의 소설에 대한 생각을 함께 증언하는 셈”이라고 집필의도를 전했다.

박범신 소설가는 “소설과 인생을 읽는 다양한 눈을 보는 건 참 즐겁다”며 “사람과 사람 사이엔 섬이 있을지 모르지만, 좋은 문학 좋은 독자 사이엔 섬이 없다. 이 책은 소설이 너른 소통의 길이라는 걸 새삼 확인시켜 준다”고 추천사를 남겼다.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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