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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한 방만 맞으면 기억력이 극도로 좋아져서 모든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신비의 침이 있다. 침의 효과는 확실한 편이다. 다만 부작용 여부는 확실치 않아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공부를 잘해서 시험에서 좋은 결과만 나오면 사람대접도 받고, 부모님의 사이도 좋아지며, 원하는 대학 진학도 가능하고, 짝사랑하는 사람과도 이어질 것 같다. 그런데 침술사는 부작용을 이유로 어느 누가 찾아와도 침놓기를 거부한다.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우리는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될까.

김범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 ‘공부해서 너 가져(웅진지식하우스)’는 일진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여고생 ‘김별’과 전설적인 침술을 자랑했으나 지금은 잘 훈련된 개들을 몰고 다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천국’ 등 독특한 캐릭터들을 통해 무한 경쟁에 노출된 학교의 실태를 신랄하게 꼬집는다.

‘김별’은 미국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 영어만 잘하는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다. 그러나 ‘김별’은 3학년 일진 ‘백도혜’가 짝사랑하는 남학생으로부터 시답지 않은 고백을 받은 뒤 의도치 않게 일진의 먹잇감이 된다. 왕따로 전락한 ‘김별’에게 더 잔인한 폭력은 일진의 주먹질이 아니라 평범한 학생들의 따가운 시선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경쟁에 매몰돼 자신과 상관없는 부조리를 철저히 외면하는 무책임한 다수를 질타한다.

‘백도혜’에게 봉변을 당하기 직전 ‘천국’이 개를 풀어 ‘김별’을 극적으로 구출한다. 이후 ‘김별’을 보는 주위의 시선이 달라지고 학교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게 변한다. 평소 ‘김별’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반장 ‘윤세정’을 비롯한 우등생들은 노골적으로 ‘김별’에게 접근해 ‘천국’을 만나려 한다. 알고 보니 ‘천국’은 과거 거금을 받고 머리가 좋아지게 만드는, 이른바 ‘S침’을 놓았던 침술사였다. 그러나 침을 맞은 학생 하나가 목숨을 잃게 된 뒤 부작용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더 이상 ‘S침’을 놓지 않는다. 이제 그는 폭력과 경쟁에 찌든 학생들을 구해내고자 학교와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기르던 개 ‘백두’의 야성을 침으로 되살려 산으로 돌려보내려고 한다.

‘김별’은 인간의 곁에 있으면 따뜻하고 배도 곯지 않을 ‘백두’의 야성을 되살리려는 ‘천국’의 태도를 이해하려 노력하며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나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그러나 ‘윤세정’을 비롯한 탐욕스러운 학생들은 부모님과 일진들을 사주해 납치까지 불사하며 어떻게든 ‘천국’을 붙잡아 ‘S침’을 맞으려고 한다. 독자들은 쉽게 선택하기 어려운 소설 속의 아비규환 같은 딜레마 속에서 주인공과 함께 자신의 가치관을 점검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저자는 지난 2012년 현대사의 아픈 부분을 한 할머니의 소동극으로 그려낸 첫 장편소설 ‘할매가 돌아왔다’로 영화, 드라마, 연극, 뮤지컬 판권을 모두 계약하며 주목받았다. 첫 장편에서 선보인 입심은 신작에도 이어져 누구 하나 미워할 수만은 없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탄생시켰고, 이 캐릭터들은 생생하게 재연된 폭력적인 교육 현장을 더욱 실감 나게 다졌다. 그럼에도, 작품의 전반에서 희망이라는 가느다란 끈이 만져지는 이유는 저자가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거두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작품 말미의 ‘저자의 말’을 통해 “이 글은 교육이라는 이름을 가진 폭력조직에 대한 고발”이라며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특별하다. 그들이 마음껏 웃으며 무럭무럭 자라서 자신만이 가진 재능을 나누는 세상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대단한 거짓말을 한 번 해봤다”고 집필 의도를 전했다.

김규항 월간지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은 “오늘날 교육의 주제는 ‘어떤 사람이 되는가’가 아니라 ‘얼마짜리가 되는가’이고, 내 아이 교육 문제의 강박증은 보수와 진보의 경계마저 허물었다”며 “10대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 된 지도 한참이지만 그런 모든 참상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감춰진다. 그 희한한 풍경은 교육 문제와 아이들 문제야말로 우리 사회의 정체와 연결되어 있음을 가리키는데, 이 작품은 파헤치려다 논설이 돼버리거나 파헤친답시고 변죽만 울리기 십상인 그 정체를 짜릿하게 파헤치고 있다”고 추천사를 남겼다.

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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