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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로 호출된 개인과 집단의 기억.. 뮌(Mioon) 의 ‘기억극장’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 자본주의 사회의 총아인 현란한 CF광고 영상이 쉼없이 명멸하는 뉴욕 브로드웨이의 타임스퀘어 광장. 뉴요커는 물론이고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 곳 중심에는 ‘뮤지컬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지 M 코헨(George M. Cohan 1878~1942)의 동상이 자리잡고 있다. 무려 51편의 뮤지컬을 작곡했고, 31편의 작품을 제작한 그는 ‘뮤지컬’이란 형식을 처음으로 완성한 거장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동상을 눈여겨 보지않는다. 모두가 현란한 전광판만 응시할 뿐이다.

동갑내기 부부작가 뮌(Mioon:김민선+최문선)은 이에 주목했다. 살아있을 당시 최고의 명망가였기에 브로드웨이 한복판에 동상이 세워졌지만 이제는 천덕꾸러기가 된 동상의 뒷모습을 영상으로 느리게 잡았다. ‘동상’이란 작품이다. 그리곤 영상 속 동상이 어느 순간 숨을 쉬도록 살짝 비틀었다. 딱딱하기 이를데 없는 청동 동상이 심호흡을 하는 모습은 무척 흥미롭다. 동상의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잡은 것도 특이하다.

뮌, 오디토리움, 캐비넷 오브제 조명 모터. [사진제공=코리아나미술관]

작가는 “코헨은 타임스퀘어를 오가는 사람들이 그의 ‘숨결’을 계속 느껴주길 바랄 것이다. 하지만 첨단 테크놀로지가 내뿜는 빛과 에너지 때문에 누구도 관심을 갖질 않는다. 뮤지컬 본산지의 집단정체성을 보여주는 ‘문화적 기억’(동상)은 이렇듯 시공간의 빠른 변화에 의해 망각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맨하탄에는 무려 50여개의 동상이 중요한 지점마다 자리하고 있었다. 쉰개의 동상을 둘러볼 수 있는 맵도 만들어져 있는데 문제는 요소요소마다 있는 그 동상을 현대인들이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상 속 주인공들이 풍미했던 시대와, 그들의 기억이 무심할 정도로 잊혀지고 있는 사실을 영상에 담았다"고 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독일 쾰른미디어예술대학과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서 각각 수학한 김민선, 최문선 커플은 ‘뮌’이라는 이름 아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남아공 등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이 부부가 독일에서 귀국한 후 처음으로 국내에서 미술관 전시를 갖는다. 서울 신사동 코리아나미술관(관장 유승희) 초대로 개막된 전시의 타이틀은 ‘기억극장’. 듀오그룹 뮌은 ‘기억’이라는 매커니즘, 기억의 효과를 ‘극장’이라는 시각적 프레임에 담아낸 영상및 설치작품 11점을 제작했다. 이로써 나의 기억, 집단의 기억은 예술로 호출돼 미술관에 넘실대고 있다.

뮌, 오프 스테이지, 스테인리스 스틸, 나무, 조명,장식품. [사진제공=코리아나미술관]

본래 개인의 기억은 그것이 아무리 또렷이 저장됐다 하더라도 불완전하고, 유동적이다. 세월에 의해 망각되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회및 집단의 기억 또한 마찬가지다. 이에 뮌은 ‘기억의 이전과 이후’를 중첩되는 잔상효과로 표출했는가 하면, 내면화된 우리의 사회적 기억을 재점검했다. 또한 개인의 기억이 세대를 거쳐 오붓한 취향으로 쌓이는 ‘가문의 기억’을 오픈 스테이지 형식으로 구현하기도 했다. 반면에 트라우마에 해당되는 억압된 기억을 어둡게 표현한 영상및 설치작업도 선보인다.

이들 작업 중 가장 관심을 모으는 작업은 5개의 대형 캐비넷이 반원형의 극장구조를 이루는 ‘오디토리엄’이다. 개인과 집단의 기억을 수백 여개의 그림자를 통해 입체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뽀얀 아크릴판 뒤로 비치는 기묘한 그림자, 캐비넷 뒤로 투영된 그림자들이 서로 어우러지며 인간기억의 구조를 환기시킨다. 기억의 중첩과 치환, 분절을 표현한 이 작업은 작품 뒷면이 더욱 흥미롭다. 

뮌, 동상, HD영상, 사운드. 3분. [사진제공=코리아나미술관]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는 캐비넷 뒤로 발길을 옮기면 수백 여개의 크고 작은 오브제들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선반에 놓인 수레, 자유의 여신상, 꽃, 비행기, 탱크, 축구골대, 각종 사진들은 무수하게 집적된 개인적·사회적 기억을 서로 이어주기도 하고, 때론 분리시키기도 하면서 기억의 비정형성, 기억의 불가해성을 드러내고 있다.

뮌은 “작품의 앞보다 뒤를 보여주고 싶었다. 매끈한 캐비넷 뒤에 자리잡은 기억이 품은 ‘날 것’에 사람들이 주목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어두운 공간 중앙에 사각의 작은 링이 놓여있고, 링 바닥에선 연기가 끝없이 흘러나오는 ‘앙상블:도덕산업’이란 공간 설치작품도 의표를 찌르는 작업이다. 세계타이틀을 연달아 차지하던 정상급 복싱챔피언이었으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나머지 싸구려술집에서 스탠딩 코미디언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인물을 그린 영화 ‘성난 황소’를 뮌은 사운드 설치작업으로 압축해냈다. 

뮌, 앙상블, HD영상, 사운드. 3분. [사진제공=코리아나미술관]

사각의 링 주변에선 영화 속 주인공 로버트 드 니로(배우)의 낮고 우울한 독백이 들린다.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복서가, 옛 영광과 추억을 곱씹으며 오늘의 팍팍한 삶을 토로하는 장면을 작가는 마치 두명의 화자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듯 교차시켜 편집했다. 화려한 옛 기억과 강팍한 오늘이 앙상블처럼 포개지고, 도덕과 악, 명성과 굴욕, 기쁨과 회한이 고리처럼 이어지는 이 묵직한 작품은 인간 삶의 불가사해함을 한편의 검은 서사시처럼 보여준다.

10m의 길고 좁은 미술관 한 구석에 3개의 붉은 커튼을 4m 간격으로 설치하고, 커튼이 열리고 닫히는 잠깐의 순간에 인형 영상(눈을 깜빡이는 모습)을 잠깐 볼 수 있게 한 작업 ‘커튼 콜’도 의미심장하다. 기억이 반추되고, 한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메카니즘을 커튼의 여닫음으로 은유한 작업이다.

강렬한 조명전구와 원색의 아크릴판을 연결망으로 구성한 벽면 조명작업 ‘캐릭터’는 얽히고 설킨 국내 재벌및 세도가의 ‘혼맥도’를 입체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자본과 권력이 단단하게 결속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뮌은 화려하고 단단한 불빛 네트워크로 드러내고 있다. 전시는 5월 31일까지. 성인 3000원, 학생 2000원. 02)547-9177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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