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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래된 연서로 돌아보는 노부부의 젊은 시절 사랑 이야기
[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노부부가 젊은 시절 첫 만남부터 신혼까지 서로 주고받은 연서를 엮은 ‘저도 양말 정도는 기울 수 있어요(따님)’가 출간됐다.

이 책은 원로학자 김준호(85) 서울대 명예교수와 그의 아내 박시현(79)가 1956년 3월에서 1961년 9월까지 5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 332동을 그대로 옮겼다.

이들은 지난 1956년 이른 봄날에 처음 만나 2년여 뒤인 1958년 5월에 약혼식을 올렸다. 이 기간 동안 주고받은 비교적 긴 편지들은 1부 ‘서로 마음을 연 두 사람’에 실려 있다. 서로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고백하고 자신의 꿈과 고민을 이야기한 사랑의 편지부터 갈등을 견디다 못해 써내려간 절교의 편지까지 두 젊은이의 사랑과 삶이 편지마다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장충단공원의 은세계(銀世界) 속에서 고즈넉한 Miss 박은 사람이 아닌 천사였습니다. Miss 박과 나란히 거닐면서 느낀 행복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저는 산책 시간을 연장하여 더 거닐고 싶었습니다. 행복의 도가니 속에서 함께 있고 싶었더랍니다.” (12쪽)

“작년 요즘에는 ‘사랑’이란 것을 이상과 공상 사이의 허상으로만 생각하였고, 감히 가까워질 수 없는 신비의 세계로만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사랑의 주인공이 된 듯합니다. 터뜨려서는 안 되는 풍선을 터뜨려버린 느낌입니다.”(25쪽)

빈농의 유복자로 태어나 큰형님에게 의지해 자란 청년과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큰오빠의 보호 아래 자란 처녀는 사랑의 힘으로 약혼에는 이르렀지만 결혼식을 치르기는 쉽지 않았다. 이들은 현실적인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이러한 심정을 서로에게 전한 편지들이 2부 ‘희망과 걱정으로 밤을 지새운 약혼에서 결혼까지’에 실려 있다.

“당신은 청첩장 양식을 구상해보세요. 결혼식은 예산의 범위 내에서 간소하게 치를 수밖에 없어요. 나만 못한 사람들도 결혼을 하니 그날이 오면 결혼식을 올릴 수 있겠지요. 아무튼 11월 1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모든 일이 예상한 대로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 아니겠어요?”(206쪽)

“어제 언니가 오셔서 저의 결혼 문제로 함께 걱정하다가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여 그만 울음이 터졌어요. 가슴속에 깊이 사무친 슬픔이 풀리지 않아요. 언제 풀릴지 모르겠어요. 당신도 결혼 문제로 무던히 걱정한다는 것을 잘 알아요. 여러 사람에게 걱정을 끼쳐 가며 결혼하려는 저 자신을 반성도 해봅니다.”(207쪽)

당시 거의 모든 이들의 삶이 그랬듯, 이들의 생활도 고단했다. 이들은 신혼생활 3년 동안에 처지에 맞는 셋방을 찾아 세 번 이사를 하면서 두 자식을 낳아 키웠다. 더욱이 직장 때문에 서로 떨어져 지내야 했기에 심신은 더욱 고생스러웠다. 3부 ‘가난했지만 꿈을 향해 나아간 신혼 시절’은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을 지켜나간 부부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나간다.

“내가 지난번에 상경하여 머물렀던 창신동의 전세방은 참으로 비참했어요. 당신을 그런 곳에서 기거하게 한 나의 책임을 통감합니다. 지난 3년 동안 이상만을 쫓고 현실을 몰랐던 나의 불찰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것이에요. 방을 얻는 돈마저도 가불하여 마련하였으니 준비 없이 결혼한 나의 불찰을 절실히 깨닫고 있어요.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저려옵니다.”

“이번 일요일에 인삼 연구로 부여에 가시는지요? 모든 잡념을 떨쳐버리고 연구에 전력투구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결혼 때문에 학문 발전에 차질이 생긴다면 우리가 품었던 결혼의 큰 뜻이 지워지는 거예요. 저는 당신의 연구 활동에 뒷받침이 되도록 노력하겠어요.”

이 책은 작은 역사책이기도 하다. 편지라는 사적인 기록을 통해 지연되는 우편, 좋지 않은 전기 사정, 예금통장, 계 등 요즘에는 낯선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당신이 말씀한 대로 부정하게 쓰던 부엌의 전깃줄을 퇴근한 후 바로 떼었고, 전등도 30촉으로 낮춰서 어둡게 지내고 있어요. 우리 생활에서 그것을 빼면 계엄령에 저촉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308쪽)

맨 몸의 두 젊은이가 민족상잔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고난의 시대에 만나 사랑을 나누고 자식을 낳아 한 가정을 꾸리는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은 여느 논픽션과 다른 차원의 잔잔한 감동을 준다.

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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