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이진용의 트렁크와 고서…재현을 넘어 ‘독창과 필연’에 이른 그림
[헤럴드경제=이영란 선임기자]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갤러리바톤에 들어서면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를 그린 한 쌍의 회화가 눈에 들어온다. 아담과 이브 양 옆에는 집적된 고서(古書)를 그린 그림들과, 켜켜이 쌓인 트렁크를 그린 그림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인간의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책(冊)들과,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는 가방들을 나란히 마주보게 함으로써, 캐면 캘수록 불가사해한 존재인 인간의 본질을, 그 이중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원천적인 그림을 그린 이는 화가 이진용(Lee Jin Yong)이다. 이진용은 갤러리바톤 초대로 ‘트렁크 - 68㎡’전을 오는 5월 24일까지 개최한다.

이진용 Hardbacks I4G04. 2013. oil on canvas 131x194cm [사진제공=갤러리바톤]

이번 작품전에서 이진용은 본격적으로 페인팅 작업에 몰두하면서 집중해온 대상인 ‘가방’과 ‘책’에 대한 깊이있는 회화적 변주를 보여주고 있다. 지식을 담는 ‘수레’인 책은 인류의 정신에 대한 갈망을, 물건을 담는 ‘수레’인 트렁크는 물질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는 양(兩)날개 같은 것이다. 이는 곧 인간이 축적한 무형의 자산과, 유형의 자산을 총칭한다.

이들 욕망은 인간 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이지만, 결국엔 모두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같은 이율배반을 압도적인 그림을 통해 우리 앞에 드러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품은 집적된 앤틱 가방을 극사실적으로 그린 ‘트렁크 시리즈’이다. 갤러리바톤 전시장 한쪽 벽면(68㎡)을 빈틈없이 꽉 채운 이 연작은 모두 26점의 캔버스(각 130호 크기)와 36점의 가방이 어우러진 일종의 설치작업이다.

가로 17m, 높이 4m에 달하는 갤러리의 기다란 한 벽면을 남김없이 꽉 채움으로써 그림 속 이미지는 무한대로 이어질 것같은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이 회화적 설치작품은 촘촘히 묘사된 각 가방의 이미지들이 독립된 리얼리티로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단순한 횡적 연대를 넘어 무의식적인 ‘회화의 계곡’을 조성하고 있다. 

이진용 Trunk PSA1018BN. 2011.oil on canvas 130x200cm [사진제공=갤러리바톤]

작품 속 트렁크들은 모두 앤틱이다. 오랜 세월 누군가에 의해 쓰임을 당했던 가방들은 곳곳에 흠집이 나 있고, 빛바랜 스티커가 부착돼 있어 가방이 지닌 스토리를 은연 중 드러낸다. 트렁크를 열면 각양각색의 오랜된 물건들이 기지개를 켜고, 쏟아져 나올 듯하다.

낡고 오래된 가방이 주는 고졸한 아름다움, 그 안에 켜켜히 쌓인 역사, 이름없는 장인들의 땀방울에 매료된 작가는 이를 현대의 미감으로, 고도의 테크닉으로 구현해냈다.

얼핏 극사실주의로 보이는 이 작품은 사실주의에 대한 작가의 남다른 해석에 의해 탄생된 작품이다. 트렁크를 쌓아올린 뒤 그대로 그린 것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나 작가의 머릿 속 ‘영상’에 따라 그려진 ‘상상력의 산물’이다. 책 그림 또한 마찬가지다. 장 자크 루소, 임마누엘 칸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등의 이름이 적힌 책 또한 실제론 존재하지 않는, 작가가 만들어낸 책들이다. 

이진용 Trunk DNA1021SN. 2014. oil on canvas 110x200cm [사진제공=갤러리바톤]

작가는 “수십년간 모아온 낡은 책과 트렁크를 관찰하면서, 그 안에 축적된 시간과 역사, 얽혀있는 관계와 가치로부터 받은 감동을 머릿 속으로 재구성해 그렸다”고 했다. 즉 수집품을 물리적으로 감촉하면서 쌓인 시각화, 기억과 영상의 오랜 축적이 ‘실제 존재하지않는 대상의 회화적 구상화’의 단계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이진용은 “눈 앞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그려냄으로써 외양의 기계적인 묘사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훨씬 자유로울 수 있다. 대상을 그저 사실적으로 재현하라면 지겨워서 그릴 수 없다. 상상이기에 즐거운 것“이라며 “어린 시절부터 끝없이 연마해온 표현적 기교를 온전히 사물의 본질, 즉 보편적이고 영원불변한 원형질의 구현에 집중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그는 대상의 본질이나 사물의 진실을 표현하는 ‘본질주의 작가’로 남고 싶다고 했다.

이진용은 미술계에서 널리 알려진 ‘수집광’이다. 동서양의 오래된 책은 물론이고 바이올린, 트렁크, 도자기, 시계, 카메라, 타자기, 보이차, 침향, 화석 등 작업실을 가득 채운 수집품이 40만∼50만 점에 달한다. 이쯤 되면 동서양의 그림과 골동품, 의상, 소품을 끝없이 탐닉하며 수집했던 렘브란트에 비견할 만하다.

이진용은 “내게 수집은 취미가 아니라 운명이다. 그러나 작업에 필요하지 않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인간의 시간과 흔적이 묻어있는 수집품은 내 작업의 원동력이자 교과서다. 그것들은 끝없이 본질을 깨우쳐준다”고 했다. 오랜 세월 작가와 함께 숨쉬고, 관계를 맺어온 수집품들은 작가의 머리와 손을 거쳐 캔버스에 새롭게 구현되고 있다.

작가의 삶은 열세살 때 재부팅(?)됐다. 중학 1년 때다. 점심후 5교시 국어시간은 나른하니 졸린 시간이었다. 그 때 교탁 옆의 노란색 주전자가 눈에 들어왔다. 미친듯이 공책에 주전자를 그렸다.

이진용 Trunk Series(Set of 26works) 2011-2014, oil on canvas, [사진제공=갤러리바톤]

그러자 선생님이 다가왔다. 크게 혼 낼줄 알았던 국어선생님은 ”와, 솔거보다 더 잘 그리지 않았니?“라며 칭찬을 했다. 그 순간 이진용은 ‘평생 매달릴 일’을 찾았고, 이후로 새벽 4시면 학교로 갔다. 미술실도 없었지만 비좁은 자료실에서 그리고 또 그렸다. 그 뒤로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작업에 할애하고 있다.

매일 한 끼만 먹으며 하루 21시간씩 작업하는 이진용은 붓을 쥐는 세번째 손가락이 휜지 오래다. 스스로를 “시간을 그리는 작가”라 칭하는 그는 “인간의 에너지가 잠과 음식으로부터만 나온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우둔한 선비처럼 매일매일 작업실에서 자유롭게 논다고 생각하며 그림을 그린다”고 덧붙였다.

작품 대부분이 1호 크기의 작은 붓으로 그려진다는 점도 놀랍다. 작가는 말한다. ”골짜기에서 똑똑 떨어지는 미약한 물방울이 바위에 구멍을 낸다는 것을 믿는다. 캔버스에 점 하나 하나를 찍으며 모든 형상을, 대상의 본질을 투영하려 한다. 고통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극한까지 가야만 비로소 작품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의 팬 중에는 유명인사들이 부지기수다. 가수이자 화가인 조영남을 비롯해, 가수 싸이의 어머니로 독특한 식당을 경영하는 김영희 씨, 배우 이병헌과 김희애, 김승우가 이진용의 그림을 소장하는 팬이다. 해외에도 그의 팬층은 무척 넓다. 

이진용 Trunk Series(Set of 26works,부분) 2011-2014, oil on canvas [사진제공=갤러리바톤]

작가 이진용의 국내외 매니지먼트를 진행하며, 비평작업도 맡고 있는 김순응 씨(김순응아트컴퍼니 대표)는 “작가는 무수히 많아도 정말 진지하게 자신의 모든 걸 투영하는 작가는 흔치 않다. 언어를 뛰어넘는 놀라운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도 별로 없다. 그런 점에서 이진용의 작업은 무척 고무적”이라며 “오늘날에는 거의 멸종된 장인정신과 예술적 기교, 엄청난 끈기로 만들어진 그의 작품은 에너지로 가득차 있다. 사실주의에서 한발 더 나아간 본질주의(Essentialism)적 접근을 보여주는 그의 작업은 해외에서 더 인기가 높다. 중국 상하이, 싱가포르 등지에서 개인전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02-597-5701.

yrlee@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