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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완전한 사랑, 그 슬픔에 대하여…”…박범신, 신작 '소소한 풍경' 펴내
신작 ‘소소한 풍경’ 펴낸 박범신
 전작 ‘소금’ 끝낸후 좌초한 느낌
붓 가는 대로 글쓰고 싶어져

세 남녀의 욕망과 죽음 그려
소유하려는 사랑은 폭력 아닌가



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자음과모음
한 사람을 향한 지고지순한 헌신을 진실한 사랑으로 믿는 뭇사람들에게 이 소설은 불온하다. 우선 남자와 여자 사이에 끼어든 여자이지만 여자가 아닌 존재가 불편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하드코어 야동’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셋의 ‘덩어리짐(세상에선 ‘스리섬’이라고 부르는)’에 경악할 것이다. 경악 이후에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성인물 저리가라할 높은 수위의 풍경에서 좀처럼 정념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셋 중 누구도 사랑이란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지만, 이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 그 사랑의 끝은 언제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분명히 다가오고 있으며, 그 모습은 파국에 가깝다. 이를 사랑이라고 부르는 일이 가능한가. 박범신 작가는 2년 만의 신작인 장편소설 ‘소소한 풍경’을 통해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정답은 각자의 몫이다.

지난 7일 서울 인사동에서 기자와 만난 작가는 “젊었을 때 쓴 작품들을 들여다보면 ‘유일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라는 식의 문장을 많이 썼는데, 이젠 그런 사랑이 부자연스러워 보인다”며 “누군가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한 꿈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소유를 전제로 하는 1대1 관계의 사랑은 폭력으로 느껴졌고, 결혼 역시 정치ㆍ사회적인 제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집필의도를 밝혔다.

작품의 서사 역시 불온한 내용만큼 낯설다. 대개 소설들이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 꺼내드는 욕망과 갈등의 서사는 이 작품에 없다. 특정한 이름 없이 ‘ㄱ’, ‘ㄴ’, ‘ㄷ’으로 불리는 주인공들은 파악하기 어려운 서사를 더욱 추상적으로 만든다. 이들의 관계는 작가의 표현처럼 삼각관계가 아닌 원에 가깝다. 기승전결에 익숙해진 나머지 책장을 넘기며 이야기 구조를 쌓으려고 하는 순간 오독은 필연이다. 이야기를 낱낱이 눈에 새기려는 시도는 최소한 이 작품에선 무의미하다. 뚜렷한 플롯(서사 작품 속에서 개별적인 사건의 나열) 없이 의식의 흐름처럼 떠도는 문장들은 실험적인 단편소설이나 시를 연상케 한다. 작가의 당부처럼 시적인 감수성으로 작품을 읽어나가는 것이 가장 적합한 독법일 것이다. 

2년 만에 새 장편소설‘ 소소한 풍경’을 출간한 박범신 작가가 지난 7일 서울 인사동의 한 식당 앞 벤치에 앉아 기자에게 말
을 건네고 있다. 작가의 모습에선 칠순을 앞둔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섹시함에 가까운 중후함이 느껴졌다. 작가는 “노인
이 쓸법한 거대담론이 아닌 이런 위험하고도 불온한 소설을 쓴 이유는 섹시하게 늙어가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작가는 “전작 ‘소금’을 끝낸 후 더 이상 쓸 말이 없어져 좌초한 느낌을 받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논리적 서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붓 가는 대로 소설을 쓰고 싶어졌다”며 “어떤 날에는 매우 쉽게 글이 움직였고, 어떤 날에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매 순간 실패했다고 느꼈을 만큼 어려운 작업이었고, 지금도 나는 이 작품을 기본적인 틀 외엔 설명할 자신이 없다”고 그간의 고충을 토로했다.

작가가 끊임없이 소설 속에서 제기하는 화두는 사랑의 불완전성이다. ‘ㄴ’의 “죽음이 아닌, 그 무엇으로도 완전히 한 덩어리가 되어 그 상태를 지속할 수 없다면, 신은 왜, 우리에게 애당초 사랑의 불꽃을 주었을까요”라는 질문과 밀폐된 방 안에 번개탄을 피워 함께 질식사함으로써 ‘덩어리짐’을 완성하려 했던 ‘ㄷ’의 무모한 시도는 다가올 끝을 알면서도 놓을 수 없는 사랑을 붙들려는 몸부림 같아 비애롭다. 작가는 갈망하지만 결코 완성할 수 없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슬펐다고 고백했다.

작가는 “젊은 시절에는 사랑의 욕망으로 살았고 사랑을 가질 수 있다고 여겼지만 이는 불가능하며 가지려할수록 고통에 빠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사랑이란 것은 영원히 갈망 속에 있는 것이지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그러한 내 정서의 밑바닥을 드러낸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나이든 티를 내지 않는 작품의 소재와 감각적인 문장은 칠순을 코앞에 둔 작가의 나이를 무색하게 만든다. ‘영원한 청년작가’라는 작가의 별명이 새삼스레 되새김질로 다가오는 이유다.

작가는 “노인이 쓸법한 거대담론이 아닌 이런 위험하고도 불온한 소설을 쓴 이유는 섹시하게 늙어가고 싶기 때문”이라며 “사랑 없는 존경보다 존경 없는 사랑이 더 낫다. 앞으로도 일상은 일흔답게 점잖게 살고 소설은 위험하게 쓸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작가는 “내일모레 일흔인 ‘인간’ 박범신과 ‘작가’ 박범신 사이에서 고통스러울 때가 많다. 내 문학적 감수성은 일흔에 도달하려면 아직 까마득하다”며 “아무 것도 쓰지 않고는 생의 본원적인 쓸쓸함을 이길 수 없다. 나는 예술가로 죽고 싶은 것이 꿈”이라고 다짐했다.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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