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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룡남’이 사라지는 세상
1980년대 고시생들의 필독서로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을‘이란 책이 있었다. 고시 합격수기 모음집이었던 이 책은 어느 드라마보다 흥미진진했다. 어린 나이에 ‘급제’한 천재들도 있지만,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로 시작하는 눈물겨운 합격기가 많았다.
책의 표제로 쓰인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길을’ 은 박영립 변호사의 합격수기다. 그의 얘기는 어떤 드라마가 대신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전남 담양의 산골마을에서 초등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했던 그는 15살에 ‘대바구니 장사 아줌마’들을 따라 무작정 상경, 여관 심부름꾼이나 음식점 종업원 등을 전전했다. 초등학교 동창들이 대학교 2학년이던 20살이 되서야 중학교 검정고시에 도전했고, 7년만에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박 변호사는 합격수기 말미에 “평범한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흔히 겪을 수 있는 과정이며,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을 걷겠다고 분명히 말씀드릴수 있다”고 겸손해 했다.
박 변호사의 소설같은 얘기는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얘기의 전형이다. 고시는 가난한 집 수재들의 유일한 신분상승의 사다리였다.
‘개룡남(개천에서 용이 된 남자)’이 사라지고 있다. 사법시험이 로스쿨로 바뀐 지 오래고, 명맥을 유지하던 사법시험도 2017년에 폐지된다. 외무고시도 지난해 사라졌고, 국립외교원 외교관 후보자 선발시험으로 대체됐다. 마지막 남은 행정고시도 사실상 존폐기로에 서게 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관피아’의 폐해를 끊기 위해 행정고시 축소와 폐지를 시사했기 때문이다.
정부 조직개편의 밑그림을 그린 유민봉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은 행정고시 출신이면서 행정학자로 유명하다. 그가 쓴 ‘한국행정학’은 행정고시 준비생들에게 필독서다. 유 수석은 이 책에서 편중문제를 언급한다. 2005년 고등고시 합격자둥 서울소재 대학 합격자 비율은 84%를 넘었다. 서울 소재 대학의 경우도 4~5개 대학이 독과점으로 합격자를 배출하고 있다.
유 수석의 문제제기가 아니라 해도, 과거 정부부터 고시 폐지 문제가 늘 논의됐다. 하지만 이번처럼 2017년까지 행정고시 선발인원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구체안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요즘 고시합격자중 ‘개룡남’은 찾아 볼수가 없고, 특목고에 명문대 출신이 많다. 민간전문가의 수혈로 공직사회의 폐쇄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찬성의 목소리가 있다.
하지만 반론도 새겨들어야 한다. 행시 선발인원 축소로 그나마 있는 ‘마지막 사다리’가 사라질 수 있다. ‘관피아’의 문제는 선발이후 문제이지, 선발과정의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도 새겨둘 만하다. 게다가 민간전문가 채용과정이 투명하지 못하고, 스펙을 맞추려면 결국 소수의 몫이 될 것이란 문제제기도 현실적이다.
관피아는 분명 문제다. 하지만 ‘관피아’가 되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공부를 하지 않을 것이다. 법률저널이 한국리서치와 여론조사를 한 결과 공채축소에 국민 71.8% 반대했다. 행시 폐지에도 반대(45.9%)가 찬성(26.5%)보다 배가 많았다는 국민 여론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jljj@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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