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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칼럼-함영훈] 호찌민 공꾸잉 ‘평화의 마을’에 희망의 빛을
베트남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점, 청동기, 철기, 농경문화 정착기 등은 우리와 거의 비슷하다. 지나(支那)의 중원세력이 동쪽 고구려,백제를 무서워했듯, 남월(南越) 역시 그들과 대립했다. 한때 식민지였고, 분단국가였다는 점, 순박하지만 자존심 세며, 매우 전략적이고 끈질긴 면도 닮았다. 인구는 세계 한(韓)민족 숫자 보다 약간 많은 9000여만명. 통킹만 앞바다에 대한 ‘남중국해’ 명칭을 거부하고 ‘동허이(東海:동해)’라고 부르는 모습에서도 동질감이 느껴진다. 거리상 3000㎞나 떨어져 있지만, 두 나라는 닮은 데가 꽤 있다.

다른 현대사를 밟으면서 경제 성과에서 차이가 생겼지만, 10일 박근혜 대통령과 응웬 떤 중(Nguyen Tan Dung) 총리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것을 계기로 상생 발전이 가속화할 것이다. 잠재력이 큰 베트남과 한국 간 경제협력 강도가 일본-베트남 보다 세다고 하니 기쁜 일이다.

베트남 개방정책(도이모이)과 소련 붕괴, 6공화국 정부의 사회주의권 교류 정책 등이 맞물리면서 한국-베트남은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2년 공식 수교한 이후 숱한 우정의 족적을 남겼다.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 동아시아에서 가장 머리 좋다는 두 민족이 맞붙으면서 미군보다는 한국군에 더 곤욕을 치른 베트남인들은 수교 이후에도 마음의 앙금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랬던 그들이 지금 한국을 ‘사돈 나라’, ‘사위의 나라’로 부르며 한류와 한국산 제품에 열광한다. 베트남 사람들의 국제결혼 파트너 1위는 한국인이고, 베트남 여인은 한국 내 외국인 며느리 수에서 2위이다.

미움이 가족애로 반전하는 과정에 공로자들이 많다. 제6공화국 정부는 개발자금을 저리로 지원했으며, 대우가 1993년 처음으로 베트남 투자에 나선 이후 한국 기업들의 진출이 앞다퉈 이뤄졌고 현지 사회공헌 활동도 뜨겁게 이어졌다.

베트남 왕족이었다가 13세기 고려로 이주한 화산이씨 문중은 수교한지 3년만에 조상의 나라를 찾아 최고위층의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두 나라간 혈연을 이어가는 계기를 만들고, 총부리를 겨누던 월남참전전우회 등 양국 퇴역군인들은 수교 10년만인 2002년 화해의 악수를 나누며 마지막 앙금을 지운다.

이제 두 나라 사이에 ‘서로 잘 살아 보자’는 내용의 명문화된 약속이 있고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마음이 있으니 앞으로 좋은 일만 남은 듯 하다.

그런데, 한가지 해결할 일이 있다. 바로 파월 한국군의 손자 손녀인 ‘라이따이한(來大韓) 3세’의 삶에 대한 문제이다. 이들의 집단거주지인 호치민시 팜응우롸 지역 공꾸잉 ‘평화의 마을’을 비롯해 베트남 전역에 7만~10만명이 산다.

아버지를 한국에 떠나보낸 2세들이 역경 속에서 생활했고, 고통은 3세들에게도 대물림되고 있다. 사회주의 정권이 고운 시선을 줄 리 없어, 교육과 사회진출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했다고 한다. 이들에 대한 우리 민관의 지원도 있어야겠지만, 베트남 정부가 스무살 안팎인 이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부여할 수 있도록 외교적 노력을 했으면 한다.

함영훈 라이프스타일부장/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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