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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먼다큐] 예술과 만난 의술, 상처 입은 마음을 보듬다
[헤럴드경제=박혜림 기자] 커다란 캔버스를 꽉 채운 한 떨기 붉은 꽃 사이로 노란 빛깔의 알약들이 비산한다. 씨앗을 흩뿌리는 모양새다.

김선현(46) 차의과학대학교 미술치료대학원 교수(원장)는 자신의 연구실에 걸린 작품에 대해 “미술 치료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어둠의 심연에서 꽃을 틔우고 정신적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환자들의 ‘새로운 탄생’이라는 것이다.

작품명은 ‘의학과 예술’. 미대 출신으로 의대 교수라는 직함을 갖게 된 김 교수의 미술치료 인생과도 포개져 있는 작품이었다.

▶아이들의 변화를 계기로 미술 인생 ‘변화’=김 교수의 본디 꿈은 화가이자 선생님이었다. 김 교수는 “어머니의 예술적 소양과 감수성이 남달랐다”고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어머니께서 항상 방에 명화달력을 걸어 두셨고 생일날이면 옹기 항아리에 백합을 한 가득 꽂아서 주셨는데 항아리의 투박한 질감과 백합의 하얀 색감이 강렬히 다가왔다”고 그는 돌이켜 말했다.

예술가가 꿈이었던 김 교수는 영화 ‘사랑과 영혼’으로 도예에 대한 관심이 쏠리기 약 3년 전인 1987년, 도예학과에 입학했다.

그런 그가 미술치료로 방향을 틀게 된 것은 학부 시절을 마치고 미술교육을 하면서부터였다. 학부모들로부터 “우리 애가 소심했는데 적극적으로 변했어요”라는 등 뜻하지 않은 감사의 인사를 들었다. 또 김 교수에게 미술 교육을 받은 성인 학생은 “그림을 배우니 우울증이 사라졌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자폐나 언어장애 등을 앓는 ‘남다른 아이’들이 보여주는 남다른 색감과 표현력도 젊은 미술학도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경기도 성남시 차병원판교종합연구원에 자리한 김선현 교수의 연구실에 걸린 작품 ‘의학과 예술’. 정신적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환자들의 ‘새로운 탄생’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박헤림 기자/rim@heraldcorp.com

▶모두의 반대 무릅쓰고 걸어온 외길 인생=이때 속된 말로 김 교수는 미술치료에 꽂히고 말았다. 결심은 굳었지만 첫발을 떼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미대를 나오면 작가가 될 뿐, ‘미술치료’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하던 시절이었다.

“주위의 반대가 심했다. ‘작가로 성공할 수 있는데 왜 의사 밑에 들어가려고 하냐’며 지도교수마저 만류하고…. 사실 과연 미술로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느냐는 회의적인 시선도 많았다.”

미술 교육으로 석사학위를 마친 뒤 미술치료 공부를 위한 대학원 진학 추천서도 받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반대에 무릎 꿇지 않았다. 하고 싶은 학문을 공부하는 게 맞다는 신념 뿐이었다.

결국 지도 교수를 설득해 상담심리학을 공부하는 한편으로 본격적으로 미술 치료 공부를 시작했다. 미술학과 교육학, 심리학 등 이론적 배경을 토대로 10년간 병원과 시민단체 등에서 다양한 환자를 만나 임상 경험을 쌓았다.

그의 노력은 2005년 결실을 맺었다. 전세일 차의과대학 통합의학대학원 원장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것. 김 교수가 미술을 전공하고 의학적 지식을 쌓며 융합을 시도했다는 점, 또 무엇보다 임상경험이 풍부한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

병원에서 1년간 근무한 뒤 김 교수는 정식으로 교수 발령을 받았다. 미술학에 교육학ㆍ심리학을 두루 전공한 경력이 되레 김 교수에게 ‘날개’를 달아 준 셈이다.

“미술치료는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신체적ㆍ정신적 상처를 그림을 통해 드러내고 대화를 이끌어내며 증상을 호전시켜나가는 대체의학입니다.” 김선현 차의과학대학교 미술치료대학원 교수가 경기도 성남시 차병원판교종합연구원의 세미나실에서 미술치료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명섭 기자/msiron@heraldcorp.com]

▶세월호 통해 아이들 ‘외상 후 성장’ 할 것=미술치료를 업으로 삼은 이상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의 아픔도 그를 비켜갈 수 없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심리치료 그리고 각종 굵직한 사건ㆍ사고의 현장에서도 김 교수는 활약했다.

특히 세월호 침몰 사고는 그의 미술치료 인생에서도 손 꼽히는 사건이었다. 당시 사고에서 생존한 단원고 학생들과 희생자들의 형제ㆍ자매 등 1000여명을 대상으로 ‘이완 프로그램’이라는 심리 안정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세월호 사고에서 보이는 특징 중 하나는 자원봉사가 자살하는 등 전국민이 슬픔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유달리 ‘우리’라는 개념을 강조하다보니 내 자식이 죽고, 고통받는다고 느끼는 것이다.” 김 교수는 세월호가 전국민에게 남긴 깊은 생채기를 우려했다.

하물며 피해 당사자인 학생들이 겪은 트라우마는 말할 것도 없었다. 어떤 학생들은 심리적 방어기제가 발동해 마치 아무 일도 겪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미술 치료를 통해 억눌린 것들이 표출되자 울음과 분노를 토해냈고, 차츰 안정을 찾았다.

김 교수는 “이같은 사고와 치료 등 일련의 경험이 외려 아이들을 더 단단하고 성숙하게 만들 것”이라고 조심스레 진단했다.

“큰 사건을 겪은 뒤 치료가 잘 되면 일반적으로 ‘외상 후 성장’에 접어든다. 우리나라도 슬픔과 애도를 넘어서 이번 사고를 안전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로 삼는다면 보다 성숙한 사회를 만들 수 있으리라 본다.”

“미술치료는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신체적ㆍ정신적 상처를 그림을 통해 드러내고 대화를 이끌어내며 증상을 호전시켜나가는 대체의학입니다.” 김선현 차의과학대학교 미술치료대학원 교수가 경기도 성남시 차병원판교종합연구원의 세미나실에서 미술치료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명섭 기자/msiron@heraldcorp.com]

▶미술치료…‘그림으로 말하고 듣는 과정’=김 교수에게 미술치료란 ‘그림으로 말하는 것을 그림을 통해 듣는 과정’이다.

차마 언어로 물어볼 수 없던 이야기도 종이와 펜을 쥐어주면, 그림으로 털어놓는 환자들이 적잖다. “다 죽어가는 마당에 무슨 그림이냐”던 일본 위안부 할머니들도 고운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내기도 했다. 미술치료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환자에는 집중력을 선물하고, 암환자에게는 삶을 반추할 여유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미술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나’ 의구심을 품고 있다.

김 교수는 “가능하다”고 답한다. “미술치료사의 역할은 그림을 통해 병적 증후를 읽어낸 뒤 치료 프로그램을 짜고 심리적 증상을 호전시켜주는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암 환자가 그림 한 장 그린다고 병이 낫는 게 아니라 병이 주는 정신적 스트레스와 신체적 통증을 잊게 하고, 또 그림을 그리며 울기도 웃기도 하면서 질병 자체를 한 걸음 뒤에서 다시 바라보도록 돕는다”고 그는 덧붙였다.

결국 미술치료의 근간은 ‘몸과 마음은 하나다’라는 심신의학에서 비롯된다는 것.

더불어 그는 “창작 활동 자체가 주는 집중력과 몰입감, 결과물이 주는 성취감은 그 자체로 좋은 치료제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미술치료는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신체적ㆍ정신적 상처를 그림을 통해 드러내고 대화를 이끌어내며 증상을 호전시켜나가는 대체의학입니다.” 김선현 차의과학대학교 미술치료대학원 교수가 경기도 성남시 차병원판교종합연구원의 세미나실에서 미술치료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명섭 기자/msiron@heraldcorp.com]

미술 치료 공인에 기틀 마련하고 싶어=김 교수는 미술치료학 발전을 위해 활발한 대외활동도 펼치고 있다. 지난 2008년에는 한ㆍ중ㆍ일 미술 치료 학회를 만들었다. 또 지난달에는 이를 전세계 23개국으로 확대한 세계미술치료학회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미술치료의 불모지와 같았던 한국 출신 초대 회장이라 더 의미가 깊다.

그러나 김 교수는 ‘시댁’ 보다는 ‘친정’일에 더 신경이 쓰인다.

“외국인들이 놀라는 것 중 하나는 한국에 미술 치료사들은 많은데 실력과 효과를 제대로 검증해 줄 수 있는 ‘제도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공인제도만이 해답이라는 것이다. 공인제도 마련을 위해 표준화된 학문적 기틀을 닦아야 하고 실제 임상에서는 잘못된 진단과 처방으로 치료시기를 놓치거나 병을 악화시키는 것도 막을 수 있다.

또 실력을 입증받지 못한 미술 치료사들이 환자의 상태, 과거 병력 등에 대한 고려 없이 단편적 평가를 내리는 것도 문제다.

“미술 치료 책에 보니 ‘나뭇잎이 없는 나무를 그리면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나뭇잎 없는 나무를 그리는 아이를 정서 장애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힘줘 말했다. 단편적 지식만으로 섣불리 미술치료를 시도하다가는 ‘선무당이 사람 잡는 꼴’이 될 수밖에 없다.

해서 김 교수는 국가 공인만이 이러한 문제를 막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일본의 경우만 봐도 공인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제대로 된 시스템을 통해 검증한 미술 치료사만 기관에서 채용할 수 있어요. 앞으로는 미술 치료 공인화ㆍ표준화에 힘쓰고 싶어요. 그게 후배들을 위한 길 같습니다.”

인터뷰 내내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지만 세계미술치료학회의 초대 회장이란 중책을 맡은 그의 어깨는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ri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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