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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칼럼-신창훈]한국정치에선 ‘싸가지’가 정파에 우선한다
언론계에서만 쓰는 용어인 ‘우라까이’는 남이 쓴 기사를 슬쩍 비틀거나 돌려서 자기 걸로 만드는 것이다.  

가끔 기자들은 자기 기사를 우라까이하기도 한다. 예전에 쓴 기사를 끄집어 내어 시점 바꾸고, 새로 취재한 내용을 살짝 추가한다. 기자 사회에서는 이걸 ‘자체 우라까이’라고 그런다. 바람직하지도 않고, 후배들에게 권해선 안될 기사 작성법이다.

죄송한 말이지만 지금부터 자체 우라까이를 좀 하려 한다. 5년 전 기자가 정치부 국회반장 시절 쓴 ‘싸가지는 이념에 우선한다’는 제목의 ‘현장칼럼’이다.  

참여정부 때 유인태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노무현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에서도 꾸벅꾸벅 졸아 ‘엽기수석’이라는 놀림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인품을 욕하는 이는 없었다. 이웃집 아저씨 같은 외모에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 속에 담긴 촌철살인의 농담 한마디는 항상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17대 국회의원 시절 그의 일화 한 토막이다. 이른 아침 의원회관 지하 목욕탕에서 유인태가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 모 의원을 만났다. 빨가벗고 이런저런 농담을 주고받다가 정계개편 얘기가 나오자 그가 던진 말이 걸작이었다. “정계개편 해야지. ‘싸가지 있는 당’과 ‘싸가지 없는 당’으로….”

과거 열린우리당 시절 ‘싸가지’란 말은 ‘네편 내편’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2004년 김영춘 의원이 유시민 의원에게 “유시민은 왜 저토록 옳은 이야기를 싸가지 없이 할까”라고 비판하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집권여당 안에서는 친노(親盧)니 반노(反盧) 비노(非盧)니 하면서 서로 ‘싸가지 없는 놈들’이라며 치고 받았다.

기자가 현장칼럼을 쓴 해인 2010년은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이 친이-친박으로 나뉘어 행정도시 건설 문제를 둘러싸고 극한의 감정대립 벌이고 있을 때였다. 당시 ‘친이-친박’은 싸가지 있음과 없음의 경계를 넘어 선(善)과 악(惡)을 구분하는 기준이었다. 

지난 8일 정청래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은 4ㆍ29 재보궐 선거 패배 원인으로 ‘친노 패권주의’를 지적하며 사퇴의사를 밝힌 주승용 최고위원을 향해 “(최고위를) 사퇴하지도 않으면서 사퇴할 것처럼 공갈치는 게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정 최고위원이 주 최고위원에게 사과했지만 이로 인해 생긴 당내 분열과 상처는 쉽게 치유될 것 같지 않다. 주 최고위원은 분명 인간적 모멸감을 심하게 느꼈을 것이다.

새정치연합은 지금 친노와 비노간 헤게모니 싸움이 치열하다. 다음 총선을 염두에 둔 공천 주도권 다툼이지만 근저엔 열린우리당 때부터 지겹게 이어져 내려온  ‘싸가지 논쟁’이 깔려 있다.

친노의 기준도 애매모호하다. ‘친노’가 노무현을 좋아하고 국정운영을 함께 한 세력이라면, 지난 선거 때 광주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천정배 의원은 그 누구보다 친노다. ‘노무현’이 과거 민주당 대선후보가 되려 할 때 가장 먼저 지지를 선언했고, 법무부 장관까지 지낸 인물 아닌가. 사실 정 최고위원도 현재 기준으로 친노인지 비노인지 헷갈리는 게 사실이다.

한국정치에서 싸가지 논란은 정책과 이념의 분화까지 가져올 수 있다. 새정치연합이 다시 서는 길은 ‘정청래 막말 사건’을 계기로 지겨운 싸가지 논쟁을 끝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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