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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부타도 維新세력들…이름뿐인 ‘천황’ 내세워…권력통합 매개로 활용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은 도쿠가와(川) 막부의 반대세력인 유신 삼걸(維新の三傑<이신노 산케츠>ㆍ메이지 유신을 이끌어낸 3대 인물) 기도 다카요시(木孝允), 사이고 다카모리(西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원훈(元勳ㆍ메이지 유신 성공에 공헌한 세력을 일컫는 말)이기도 한 이들은 ‘천황’의 정치적 영향력이 권력을 통합시킬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인식했다. 더군다나 하급무사였던 이들은 다이묘처럼 신분이 높은 무사들을 억누르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다. 일왕은 말 그대로 하급무사들에게 권력을 쟁취할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보석, ‘옥(玉)’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원훈들 사이에서는 ‘옥을 잘 품어야 한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천황을 시장에서 거래되는 아름다운 보석처럼 취급했다. 1864년 원훈세력이 일왕을 이용하려고 한 때는 즉위한 지 5개월밖에 안 된 메이지 일왕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일왕의 존재는 널리 천하에 알리기 위해 존재한다’며 최고지위자의 권력이 보이지 않을 때 발생하는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왕도 교육시켰다. 일왕이 ‘국체(國體ㆍ국가의 상징)’으로 자리하기 위해서는 그 권력을 유지하고 원훈과 협력할 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메이지 일왕은 즉위 초 유약하고 여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자신을 수호하는 원훈세력은 큰 의지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메이지 일왕은 오쿠보와 사이고를 가장 가까이 두고 두터운 신뢰를 보였다고 한다.

윤훈은 일왕 스스로가 개화에 나서면 정치체제는 유지한 채 문명개화를 도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설파했다. 천황과 윤훈은 서구의 선진적인 문화는 취하되, 이를 ‘일본화’함으로써 이를 동양국가에 전파하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메이지 일왕이 처음부터 이들에 동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메이지 일왕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서구 문화를 너무 좋아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1871년인 19살 무렵, 메이지천황은 ‘정한론’을 주창한 것으로 유명한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군인교육을 받았다. 1년이 지난 1872년 그는 군대를 직접 지휘하는 훈련에 임했다.

메이지 일왕은 이후 1882년 1월 4일 ‘군인칙유’를 발표해 “우리나라의 군대는 대대로 천황이 통솔한다”고 밝혔다. 당시 메이지 일왕은 자신의 서명 하나가 얼마나 많은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무거움을 알지 못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문재연 기자/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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