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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일본 (上)<세계의 왕실>‘천황=神’ 공식 부정…일왕은 신도 인간도 아닌 ‘권력의 상징’
천황은 하늘의 자손 이라는 뜻…천황 명칭 7세기 처음 등장
메이지 유신으로 일왕중심제 정착…실권 없지만 국가원수로 인정



“나와 신민과 사이의 끈은 언제나 상호의 신뢰와 경애에 의해 결합되고, 단순한 신화와 전설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다. 천황을 현인신(現人神, 사람 모습의 신)이라 하고, 일본 국민을 다른 민족보다 우월한 민족이라 하고, 게다가 세계를 지배해야 하는 운명을 가졌다고 하는 가공적인 개념에 기초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1946년 1월1일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국운진흥조서’의 일부다. 일왕이 이 글에서 처음으로 ‘천황=신’을 공식적으로 부정한다. 이 때문에 ‘인간선언’이라고도 부른다.

일본의 지배자를 고대에는 ‘오오키미(大王)’ 또는 천왕(天王)이라 불렀다. 7세기 들어 ‘천황’이란 명칭이 등장하고, 7세기 후반 다이호 율령(大律令)에서 법제화된다.

황(皇)은 황제란 뜻으로 중국의 황제(皇帝)와 통한다. ‘천(天)’이 붙는다. 하늘의 자손이란 뜻이다. 중국의 천자(天子)는 하늘의 뜻을 받은 사람이지만, ‘천황’의 천은 하늘의 자손이란 뜻이다.

일본이 주장하는 ‘천황’의 시조는 ‘아마쓰히타카히코호노 니니기노미코토’다.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天照)의 손자다. 일본 전통종교 신토(神道)는 삼라만상에 신이 머문다 여긴다. 일본 왕가는 단일 가문이다. 태양신 숭배가 최고통치자의 명칭에 반영된 결과다. 일본국기도 태양을 상징한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초기(1868~1869년)에 정부는 인민고론(人民告諭)과 어론서(御論書) 등을 각지에 출간했다. 인민고론은 일본 왕가의 기원이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신화에서 비롯한다는 내용이다. 어론서 역시 일왕은 인간 신이며, 일본의 주인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역사를 통틀어 일왕을 인간이 아닌 신으로 규정한 작업은 이때 가장 활발하게 이뤄졌다.

하지만 일본 역사를 살펴보면 ‘태양신의 자손들’은 통치자라기 보다는 정치적 상징에 가깝다. 실권자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했을 뿐 실제 권력을 행사한 기간은 길지 않다.

‘천황’이란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게 7세기 때지만, 헤이안(平安)시대인 858년(덴난 2년)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 최초로 셋쇼(攝政)가 사실상 통치자가 된다. 헤이안 시대 이후에는 무신정권인 막부(幕府) 체제로 바뀌었을 뿐 ‘천황’은 역시 허수아비였다. 헤이안 시대부터 도쿠가와 막부 때까지는 ‘미카도’(御門, 帝)라거나 ‘긴리’(禁裏), ‘다이리’(裏), ‘긴주’(禁中) 등의 여러 표현으로 불려졌다.

막부의 수장에게 세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이라는 관직을 내리는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했던 일왕을 굳이 민중에 알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심지어 막부시대에는 천황의 존재 자체를 몰랐던 이들이 다수였다고 한다.

메이지유신으로 다시 ‘천황’이란 명칭이 널리 사용되고 일왕중심제가 성립됐지만, 역시 실권은 의회와 내각총리대신이 가졌다. 메이지정부의 초대 내각총리대신이 바로 유신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다. 결국 ‘셋쇼’나 ‘쇼군’이 ‘슈쇼우(首相)’로 바뀐 것 뿐이다.

일본제국의 모든 침략행위와 반인륜적 행위의 최종의사결정권자는 일왕이었다.

일본제국 헌법 체제에서 일왕은 신성불가침의 존재였으며, 일왕 존엄을 침해하는 행위는 불경죄로 의율하여 중하게 처벌했다. 또한 일왕은 ‘천황대권’으로 불리는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모든 통치권을 총람하는 존재였다. 즉 국가의 모든 작용을 통괄하는 권한을 가진다

하지만 2차 대전 후 일왕은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았다. 1945년 11월,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 내각은 각의 결정을 통해 “천황은 대미 교섭의 원만한 타결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으며, 전쟁 중의 모든 결정은 일본 제국 헌법의 관례에 따른 단순한 재가에 지나지 않았다”며 책임을 부인했다.

일왕 입장에서는 교묘하게 위기를 벗어난 셈이지만, 달리 보면 권력자들의 정치에 휘둘린 ‘꼭두각시’에 불과한 나약한 존재임을 자인한 셈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일본 헌법에서도 일왕은 상당한 정치적 상징성을 같고 있다.

헌법에서 일왕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의 통합의 상징이다. 각각 국회와 내각의 지명에 근거하여 행정부(내각)의 수장인 내각총리대신과 사법권을 행사하는 최고재판소 장관을 임명한다(제6조). 또 국권의 최고기관이며, 국가의 유일한 입법기관”인 국회를 소집(제7조 2호)·해산(제7조 3호)하는 등, 국정의 중요한 행위를 ‘국사행위’로 수행한다(제7조, 다만 국사행위에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에 의함).

아울러 전권위임장 및 대사, 공사의 신임장을 인증(제7조 5호)하고, 비준서 및 법률이 정하는 기타 외교 문서를 인증”(제7조 8호)하며, 외국의 대사 및 공사를 접수(제7조 9호)하는 등 일반적으로 국가 원수가 수행하는 외교상의 주요 행위를 하도록 정하고 있다.

헌법 제4조가 일왕에 대해 헌법이 정한 국사에 관한 행위만을 행하며, 국정에 관한 권능은 갖지 않는다고 규정돼 있지만 헌법에 구체적인 권하이 명시된 만큼 상징적으로만큼은 사실상 국가원수인 셈이다.


문재연 기자/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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