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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차대전 후 책임추궁 왜 안받았나…최고사령부 ‘大本營’서 직접 지휘…“불행한 과거사” 유감표명이 전부
일왕은 전쟁 중 최고사령부인 ‘대본영(大本營)’에서 직접 군을 지휘했다. 실질적으로는 대신 및 장군들이 명령을 내렸지만 형식상으로 최고명령권자는 일왕이었다.

히로히토(쇼와) 일왕은 중일전쟁과 2차 대전당시 일본이 이미 조인한 바 있는 베르사유 조약 제171조를 비롯하여 여러 국제 협정에서 금지한 화학 무기의 사용을 허락했다. 일본군은 중일전쟁 중 중국과 몽골의 주요 전투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독가스를 살포했다. 2차 대전 중에는 중국에서 세균 무기의 사용을 허락하고, 세균전을 책임지는 731 부대의 창설을 재가했다.


일왕은 또 중국의 여러 도시에서 일명 삼광 작전(三光作戰)이라 불리는 방화, 살인, 약탈이 포함된 작전을 명령했다. 적 또는 지역 주민을 가장한 적과 잠재적인 적이 될 수 있는, 주민 중 15세에서 60세에 이르는 성인 남자“를 모조리 죽이는 것이 이 작전의 목표였다.

역사학자 히메타 미쓰요시는 쇼와 천황이 재가한 이 ‘섬멸 작전’으로 적어도 247만 명 이상의 비전투 민간인이 죽음을 당했을 것이라고 추산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전쟁 중 책임에도 불구하고 일왕은 전쟁 후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았다.

일왕을 일본 국민의 구심점으로 판단한 맥아더는 1946년에 ”일왕을 강제로 무너뜨리면 일본 국민들이 반발하여 대규모 게릴라전으로 대항할 것이며, 이를 상대하려면 적어도 100만 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진보성향의 일본 아사히(朝日) 신문은 2001년 8월 15일자 사설에서, “1945년의 원점에서 다시 서보면 결국 쇼와 천황(히로히토 일왕)의 전쟁 책임은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군에 대한 모든 명령이 육해군의 통수권자인 천황의 이름으로 내려졌다. 천황은 전쟁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밝혔다.

2000년 12월 도쿄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서는 히로히토 일왕에게 유죄 판결이 선고되기도 했다.

종전 이후 일왕은 한국에 대해 과거사와 관련 몇 차례 발언을 남겼다.

1984년 11월 6일 히로히토 일왕은 일본을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에게 “우리 사이의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입니다. 난 이것이 다시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1990년 5월 24일에는 히로히토 일왕의 아들인 하키히토 일왕이 노태우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우리 국가에 의해 전해진, 이 불행한 기간 동안 당신의 국민들이 겪었던 고통을 비추어 볼 때, 가장 큰 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밝혔다.

1996년 10월 8일 아키히토 일왕은 김대중 대통령과의 만찬에서 “우리 국가가 한반도에 크나큰 고통을 가져온 기간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것에 대해 느끼는 깊은 슬픔은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연설했다.


문재연 기자/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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