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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슈퍼리치] 법 어긴 해외부자, 죽어도 죄는 남았다
- 위증ㆍ담합혐의로 기소당한 호주 부호, 죽기 전 날 사면
- 적성국가 거래로 기소 후 사면된 美 ‘석유 무역왕’, 도피생활 끝 사망


[헤럴드경제=슈퍼리치섹션 윤현종 기자] 호주와 미국을 주름잡았던 부호 2명이 있었다. 같은 해 태어난 둘은 각자의 업계에서 ‘왕(王)’으로 불리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모두 위법행위로 추문에 휩싸여 수십 년 간 쌓은 명성이 한 순간 나락으로 떨어졌다. 현재 모두 고인(故人)이 된 이들은 비록 생전에 사면받긴 했지만 논란은 이어졌다. 죽어도 죄는 남아서다.

잘 나가던 호주 ‘포장재 왕’의 가격담합, 죽기 하루 전 날 용서 받았지만…=호주 억만장자 고 리처드 프랫은 1934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프랫 가족은 1938년 호주로 이민해 농산물 포장재 생산공장을 차렸다. 지금의 비시(Visy)그룹이다.

프랫은 1969년 비시 창업주 레온 프랫이 사망하자 회사를 물려받아 1970년대부터 기업확장에 나섰다. 뉴질랜드ㆍ미국 등으로 거점을 넓혔다. 호주에만 있던 공장 2개는 55개로 늘었다. 사업 영역도 폐지 재활용 박스 등 관련 업종으로 넓혔다. 일찍부터 친환경제품 시장에 눈을 뜬 프랫은 업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됐다.

그는 각종 기부 행보로 ‘좋은 사업가’ 이미지도 굳혔다. 1978년 세운 ‘프랫재단’은 매년 1000만 호주달러 이상을 난민ㆍ예술가단체 지원, 의학연구 등에 썼다. 재단의 기부규모는 현재 2억 호주달러(1725억원) 이상으로 집계됐다.

그는 정파를 가리지 않은 정치인 후원로도 유명했다. 호주선거관리위원회(AEC)에 따르면 2000년 이후 프랫 측의 정치기부금 193만 호주달러 가운데 70%가 자유당, 30%가 노동당으로 배분됐다.

리처드 프랫 비시그룹 회장과 비시그룹 로고

잘 나가던 프랫과 그의 비시그룹은 그러나 철퇴를 맞는다. 2005년 12월 호주 경쟁 및 소비자위원회(ACCC)가 비시의 포장재 가격담합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발표한 것. 2007년 10월엔 같은 혐의로 ACCC에 고소당했다. 당시 가격 담합 규모는 7억 호주달러(6040억원)로 호주 사상 최대였다. 이에 대한 각종 폭로도 꼬리를 물었다.

시장질서와 법을 어긴 프랫의 위기는 당시 최고액을 찍은 벌금(3600만호주달러) 납부로 끝나지 않았다. 2009년 그는 ACCC의 담합 조사 당시 거짓증언을 한 혐의로 현지 검찰에 의해 기소까지 당했다. 프랫은 총 4가지 죄목으로 징역 1∼4년까지 처해질 수 있었다. 수사망은 좁혀졌고 여론도 악화일로였다. 

공판 당시 법원으로 들어가고 있는 리처드 프랫 회장 [출처=디 에이지 닷컴]

당시 프랫은 척수암 수술을 했지만 암세포가 퍼져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결국 호주 연방법원은 프랫이 죽어가고 있단 병원 소견을 접수한 2009년 4월 27일, 검찰이 기소한 위증 사건을 기각했다.

철창 신세를 겨우 벗어난 프랫은 하루를 더 살고 죽었다.

그러나 호주 검찰은 당시 “이 사안은 (그의 생명과 관계없이) 계속 수사할 수도 있다. 죄는 남아있다”는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다.

사실상 서류상으로만 ‘범법자’ 신세를 면한 프랫의 사망 당시 개인재산은 1조7600억원(15억달러), 호주 4위 수준이었다.

사면 뒤에도 고국 땅 못 밟고 죽은 美‘무역왕’=한때 미국 ‘석유무역 왕’ 또는 ‘상품자재(Commodity)왕’으로 불렸던 부호도 리처드 프랫과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 바로 고 마크 리치다.

그 또한 1934년 벨기에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1941년 미국으로 이민한 프랫은 대학 자퇴 후 ‘피브로’란 무역회사에서 장사를 배웠다. 이곳에서 국제 원자재 시장 흐름을 익힌 리치는 1974년 자신의 이름을 따 무역회사 ‘마크 리치 앤드 코’를 세웠다. 지금의 글로벌 원자재 거래업체 ‘글렌코어’다.

리치가 ‘석유왕’이란 별명을 얻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는 1973∼1974년 석유파동 당시 이란과 이라크에서 원유를 사 미국 석유회사에 갑절 가격으로 팔며 명성을 날렸다. 1980년대엔 부동산으로도 사업영역을 넓혔다. 

마크 리치와 그가 창립해 훗날 성장한 글렌코어 로고

그러나 1983년, 이름(Rich)처럼 부호가 된 그 또한 법을 어겨 당국의 기소대상이 되고 말았다. 사실 국제무역은 ‘위험한 거래’일수록 수익이 크다. 이란ㆍ쿠바 등 당시 미국의 적성국가와 끊임없이 석유를 거래해 온 리치는 사기ㆍ조세포탈 등 60여 가지 혐의로 법의 심판대에 올랐다. 그는 민사상 벌금 수억달러를 내고 스위스로 도피했다. 형사기소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그는 17년 간 국제수배자가 됐다.

결국 그는 2001년 1월 20일, 미국 정부의 사면대상자에 포함된다.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이 퇴임 몇 시간을 앞두고 내린 결정이었다. 이는 큰 논란을 낳았다. 당시 리치의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 루이스 리비(후에 2001∼2005년 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인물) 조차 “그가 미국인질을 잡고 있던 적성국가와 무역거래를 한 것 잘못”이라고 비판했을 정도다.

2010년 출간된 마크리치 관련 서적 ‘석유왕, 그 비밀스런 삶’ 표지

논란은 스캔들로 번졌다. 잡지 못한 범법자를 풀어준 것도 모자라 리치 전 부인의 ‘사면로비’사실까지 공개돼서다. 리치 전 부인은 클린턴 대통령의 정치후원금 모금 책임자로 알려졌다.

게다가 리치의 정신적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던 이스라엘도 리치의 사면을 촉구해 일은 더 복잡해졌다.

뉴욕타임스(NYT)를 비롯한 여러 주류언론도 그의 사면 정당성을 끈질기게 추궁하며 사태는 사실상 그가 2013년 사망할 때까지 수그러들지 않았다.

죄인 신세를 벗은 뒤에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12년 간 스위스에 살던 리치는 뇌졸중으로 79세의 생을 마쳤다. 사망 당시 그는 개인재산 1조1700억원(10억달러)을 쥐고 있었다.

factis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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