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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73. 춥고 아프고 배고픈 순례자…힘겨운 산티아고
-까미노 데 산티아고+2:수비리에서 팜플로나까지 20km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아침식사를 하고 도시락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찍 일어난다. 알베르게의 주방에서 바나나와 계란으로 아침을 먹고 스페인식 샌드위치인 보카디요를 만들어 도시락을 준비한다. 중학생 시절 이후로 아침밥을 먹어 본 적이 없지만 여행 중에는 챙기게 된다. 조식을 주는 호스텔이 있다면 꼭 먹는 편이다. 여행이라는 게 환경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라 사람도 바뀌는 것이다. 어제 처음으로 걸어본 경험으로, 걷는 일은 체력소모가 대단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초코바도 몇 개 챙겨 놓았고 오늘은 아침식사도 일부러 한다. 하루를 걷고 나니 조금 겁이 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도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는 통에 알베르게는 분주하다. 영국인 이안 할아버지는 어제 도미토리에 라이언(Lion)이 있었다면서 눈을 동그랗게 뜬다. 간밤에 누가 코를 심하게 골았는데 그걸 그렇게 비유하는 거다. 여럿이 한 방을 쓰는 데다 피곤하기까지 하니까 그런 일은 흔하긴 할 것이다.

수비리에서 팜플로나까지는 아르가(Arga)강이 흐르고 있다. 며칠 새 내린 눈과 비 때문에 강물이 엄청 불어나 콸콸콸 쏟아지듯 흐른다. 아직도 비를 품고 있는 하늘엔 잿빛 구름이 꾸물거린다. 입김이 하얗게 나와도 상쾌하기만 하다. 비록 배경은 이질적인 스페인 시골이지만 걸으면서 보는 풍경은 한 폭의 수묵화다. ​



어떤 형식으로든 까미노에는 표시가 있다. 파란 조개는 공식 표지이고 그것 말고도 다양한 화살표를 따라 걷는 매우 안전한 길이다. 오늘 아르가강을 따라 걷는 길은 전원적이다. 오른쪽엔 불어난 강물이 빠르게 흘러가고 왼쪽엔 숲이 무성하다. 걷다가 들르게 되는 마을은 날씨 때문인지 계절 때문인지 너무도 고즈넉하다. 손바닥만 한 마을에는 옛 모습을 간직한 시골 농가들이 모여 있다. 사람이 살까 싶을 정도로 조용한 마을, 지나가는 사람이라고는 까미노를 걷는 순례자들 뿐 일 것 같다.

어떤 마을을 나가는 길은, 마을 전체가 마치 하나의 집인 것처럼 작은 나무문이 달려있다. 마을을 등진 채 문을 열고 발을 내딛으면 그 길에서 숲의 요정이라도 만나게 될 것 같다. 빗방울이 흩뿌리다 멈추길 반복해서 안개가 피어오르는 숲길에선 말할 수 없이 상쾌한 공기가 떠돈다. 길이 젖어 앉기는 불편해도 넓적한 돌에 엉덩이를 살짝 대고 앉아 강물을 바라본다.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말이 바로 이 순간이다. 걷느라 더워진 몸을 식혀주는 차가운 공기가 두 뺨으로 느껴진다. 여기, 낯선 스페인이라는 나라에서 느끼는 더 낯선 시골마을의 정취는 더욱 그윽하다.



저 예쁜 풍경들, 안개 낀 산자락, 푸근한 스페인 농가, 산골의 작은 마을의 아늑함, 알던 것과는 조금은 다른 나무, 숲, 이제 막 싹트는 새싹들 그리고 말, 양, 개, 고양이, 이름 모를 새들. 귀를 간질이던 지저귀던 새소리, 흘러 넘치던 물소리….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은 그토록 까미노로 오려던 나의 의지가 전해준 선물이리라 싶다.

아직까지는 까미노의 성수기가 아니라서 인적도 드물다. 사람을 자주 만나지 못하는 이 길이 오히려 좋다. 함께 걷는다고 해서 늘 발걸음을 맞추는 것은 아니기에 케이는 앞서 가면, 이 아름다운 풍경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 된다. 이렇게 이국의 하늘 아래를 걸어간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보다 이 하루를 감사히 여겨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마냥 걸어보는 자유를 가질 수 있음 그 자체에 감사한다.



어느 마을의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카페가 눈에 띈다. 각국의 언어로 문을 열었다는 표시를 해 둔 게 재미있기도 하고 쉬지 못하고 걷던 터라 다리도 아프고 해서 들어간다. 인적 드문 산골의 작은 카페는 손님의 인기척이 느껴지고 나서야 주인이 나온다. 아무렇게나 모자와 장갑을 벗어던지고 마시는 1유로짜리 카페콘레체의 따스함과 달콤함이 풍경 속에 녹아든다.

커피를 마시고 길을 나서는데 하얀 수염의 할아버지가 소매를 잡아끈다. 창문을 주위를 부조로 장식하는 일을 하고 계시던 할아버지는 조각칼을 보여주며 자기가 하는 일이라고 사진 찍으라고 손짓 발짓을 한다. 마을에서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은 터라 반갑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가 주섬주섬 꺼내는 것은 엽서뭉치다. 한 장은 공짜로 줄 테니 다른 엽서는 1유로를 내란다. 아직 비수기여서 그렇지만 이게 부업인 건지 순례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엽서를 파는 것 같다. 사기 싫지만 아무도 없는 길에서 말도 안 통하는 할아버지를 외면하고 올 수도 없어서 마지못해 한 장을 산다.



흔하지는 않지만 예쁘게 꾸며놓은 계단도 지나고 그래피티가 그려진 지하도도 지나치면서 화살표를 따라 걷는다. 가끔 만나는 십자가는 이곳을 걷다가 사망한 사람들의 추모표시인 듯하다. 잠깐 길을 잃어 두리번거리면 길가에, 담벼락에, 골목 모퉁이에, 길바닥에 어딘가에는 꼭 노란 화살표가 있다.

견고해 보이는 돌다리 저편의 마을을 지나간다. 마을에서 온기를 느끼는 건 사람이 살고 있다는 따스함 때문이다. 얼굴도 모르는 스페인 사람들의 체온이 순례자의 마음을 덥혀준다. 걷기 이틀째, 마음은 점점 여유를 찾는데 뒷다리와 발꿈치는 뭉치는 듯 슬슬 아파온다. 어제는 첫날이고 눈을 헤치고 걷느라 몰랐는데 오늘은 발이 아픈 게 미세하게 느껴진다. 여행과는 차원이 다른 길임은 확실하다. 그야말로 “순례” 아닌가?



까미노는 거의 중세부터 순례자들이 다니던 마을이나 길로 안내하기 때문에 경치가 좋은 오솔길이나 샛길이 많다. 국적을 초월해서 까미노를 걷는 사람이 많으니 스페인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는 것 같다. 경치 좋은 길을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부득이하게 차가 휙휙 다니는 도로를 건너야 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큰 차도를 건너니 단장된 공원이 보인다. 까미노의 상징인 조개껍데기 부조 아래 짐을 내려놓는다. 중세 때는 순례자들의 크레덴시알(Credencial : 순례자여권) 구실을 했던 것이 짐에 매달고 다니는 조개껍데기였다고 한다. 그래서 순례자들은 지금도 흰 조개껍데기를 배낭에 달고 다닌다. 



여기서 쉬면서 아침에 준비한 도시락도 먹는다. 풀밭 위의 점심 같은 예쁜 자태가 아니라 공원의 노숙자 포스로 허겁지겁 먹는다. 고된 노동이라도 한 듯, 딱딱해진 바게트 빵과 식어버린 계란이 잘도 넘어간다. 먹는 일에 초연하다고 자부하는 내가 이러고 있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저 걸었을 뿐인데, 땀이 나고 배가 고프고 어깨는 쑤시고 다리는 아프다. 그저 걸을 뿐인데, 머릿속이 맑아지고 피부에 와 닿는 차가운 공기가 상쾌하다. 걸음걸음이 온몸의 감각을 자극한다.

짐을 마드리드 알베르게에 덜어놓고 왔는데도 케이의 배낭에 비하면 내 배낭은 크고 무겁다. 케이는 까미노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들만 가지고 온데 반해 내 배낭은 여러 벌의 옷, 가이드북, 화장품 같은 쓸데없는 물건들 때문에 무게가 많이 나간다. 여행할 때는 큰 배낭을 숙소에 두면 되니까 잘 몰랐는데 까미노에선 짐을 지고 움직이니 어쩔 수 없이 무게를 시시각각 느끼게 된다. 까미노에서의 짐은 인생의 무게라고 하더니 내 생의 무게는 왜 이리 무거운 걸까?



까미노의 출발지 론세스바예스로 가기 위해 들러 걷는 연습까지 하던 팜플로나가 다가온다. 중세의 돌바닥이 아닌 보도블록이 깔려있는 것을 보니 대도시가 목전에 있음을 눈치 챈다. 보도블록 위에서도 다양한 까미노 표시를 만날 수 있다. 오늘의 목적지인 팜플로나에 가까워질수록 거리는 잘 정비되어 있다.

배에 거지가 들어가 앉은 건지, 도착 직전에는 저녁 어떻게 먹을까 하는 궁리만 하다가 드디어 팜플로나로 들어가는 다리에 도착한다. 돌다리를 건너자마자 보이는 알베르게로 직행한다. 이 알베르게는 특이하게도 독일인들이 운영한다고 하더니 스페인어가 서툰 오스피탈레로(hospitalero:알베르게에서 순례자를 돕는 자원봉사자) 한 사람을 포함해 두 사람이 알베르게 일을 보고 있다.

운영하는 사람에 따라 알베르게도 다들 개성이 있다. 이곳은 오스피탈레로 가 친절하면서도 엄격(?) 해 보인다. 지쳐서 그대로 알베르게에 들어가려는데 진흙투성이 등산화는 1층에서 따로 벗어 꼭 신발장에 넣으라고 질색을 한다. 크레덴시알에 도장을 받기까지 꼼꼼히 체크하고 주의사항을 알려주는 동안은 차와 비스킷을 내어준다. 나 원래 이러지 않는데 싶지만, 그건 과거의 기억일 뿐이고 지금은 그냥 춥고 배고픈 순례자의 몰골 그대로다.



걷는 사람이 많지 않은 계절이라 4인실 도미토리에서 둘이 묵는다. 빨래도 마음대로 늘어놓고 말리고 음악도 스피커를 켜서 들어본다. 젖은 신발을 물로 아예 빨아서 신문지 뭉치를 구겨 넣고 라디에이터에 또 엎어놓는다.

어제까지 내린 비 때문에 고인 빗물이 진흙탕 웅덩이를 이루는 길이어서 오늘도 나의 가난한 트레킹화는 또 젖었다. 현상은 현상 그대로 객관적으로 수용해야 했다. 혹시 오늘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섣부른 낙관은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어제도 오늘도 젖은 신발을 신고 걸었으니 내일 또다시 신이 젖는다 해도 받아들일 거라는 확신은 생긴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두렵지 않다.

20km는 하루 동안 걷기에 적당한 거리라는데 왜 그리 길게 느껴졌을까?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온전히 나의 동력만으로 가고 있는 이 길의 단순함에 적응하는 중이다. 하루를 이렇게 사는 방법도 있었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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