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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 목포는 어떻게 최초 걸그룹, 최초 한류을 낳았을까.
[헤럴드경제 목포=함영훈 기자] 문학, 미술, 무용, 전통예술, 성인가요(트로트), 대중가요, 걸그룹에 이르는 한국문화(K-컬쳐)의 다양한 장르는 서로 연관성이 있을까.

‘한 사회의 개인이나 인간 집단이 자연을 변화시켜온 물질적, 정신적 과정의 산물’이라는 문화의 사전적 의미에 비춰보면 그 연관성과 장르간 상승작용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쉽게 수긍이 간다.

목포 삼학도 전경

▶왜 목포는 예향인가

목포는 예향(藝鄕)으로 불린다. ‘길목’ 도시 답게 다양한 문화가 오가고 이를 주민들이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어느 지역 보다 문화적 풍요로움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인구 5151만명 중 24만명을 가진 목포에서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75명중 5명이나 보유하고 있다. 미술의 허건 김환기, 문학에 박화성, 차범석, 무용에 최청자 등이 그들이다.

또 온 국민을 울리고 웃긴 무형문화재인 이매방, 공예분야 무형문화재 장주원, 문학인 김지하, 김현, 김진섭, 천승세, ‘사의 찬미’를 지은 극작가 김우진 등이 이곳 출신이다.

목포의 문화예술의 우수성은 K팝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목포의 눈물’ 이난영, ‘님과 함께’의 남진, 국내 최고 로커 김경호, 서편제의 오정해, 아이돌 한류스타 수퍼주니어의 동해 외에도 무수히 많다.

조대형 목포시 수석 문화해설사는 “목포 문화예술인들은 다양한 문화를 접하면서 다른 지역에 비해 한 차원 높은 역량을 발휘했다”면서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은 단순한 트로트 가수가 아니라 다양한 실험을 했던 아티스트였고 그 영향은 한국 가요계가 발전하는데 큰 영향을 줬다”고 전했다.

1963년 함께 공연했던 ‘김 시스터즈’와 포즈를 위하고 있는 이난영(오른쪽 두번째).

▶서태지 보다 이난영

한국가요계 선구자 격인 이난영(1916~1965)은 ‘향수’로 데뷔한 지 2년만인 1935년 세기의 히트곡 ‘목포의 눈물’을 발표한다. 가난한 살림살이 때문에 여공으로 일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그였다.

이난영은 처음엔 정통 트로트로 발성했지만, 이듬해부터는 목포의 눈물에 비음 발성을 최초로 시도했다. 샹송이나 칸소네 풍을 접목시킨 것이다.

1897년 목포가 특정국의 강압이 아닌 자발적으로 개항한 후 미국 독일 영국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 6개국의 문화를 고루 섭취하면서 이곳 문화예술인들의 창의성이 어느 곳 보다 뛰었났다는 게 조 해설사의 설명이다.

이난영은 솔로가수가 애수와 애환을 전하는데에는 걸맞지만 대중에게 즐거움을 주는데엔 한계가 있고, 여럿이 부르며 군무를 할 때 즐거움이 배가되는 것을 일찌기 알았다.

이난영은 1939년 ‘오빠는 풍각쟁이야’의 박향림, ‘연락선은 떠난다’의 장세정, 민요가수 이화자로 구성된 최고 걸그룹 ‘저고리시스터즈’의 리더가 된다. 이들은 소속사 사장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영속적인 걸그룹으로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일본 공연에서 큰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고 목포 문화예술인들은 전한다.

이난영의 4남3녀도 모친의 DNA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요즘으로 치면 연예기획사 대표였던 남편 김해송이 한국전쟁 중 납북됐지만, 1958년 부산의 대표 가수 남인수의 구애를 받고 최초 영호남 가수부부가 된 이난영 가족은 대중가요를 발전시킨 최적의 토양과 환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1958년 자신의 두 딸인 김숙자, 김애자와 작곡가인 친오빠 이봉룡의 딸 이민자 등 3명으로 ‘김시스터즈’라는 걸그룹을 만들어 미8군에 데뷔시켰다. 1940~1950년대 이난영의 기획력과 실험정신은 1990년대 서태지를 능가한다.

남진 이름을 딴 목포의 남진야시장

▶다양한 실험, 편곡에 기획까지

의외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자 이난영은 딸들은 팝의 본고향인 미국으로 보냈다. 아울러 김시스터즈의 미국 초기 작품 ‘닐리리야’를 손수 서양풍을 편곡하는 실력을 보이면서 ‘K팝 한류’의 기틀을 닦았다고 지역 향토사학자들은 전한다.

이들은 라스베이거스 무대에서 최고 인기를 구가하면서 한국인 이름으로 빌보드차트 7위까지 올랐고 1963년엔 미국 최고 인기 TV쇼인 ‘버나드쇼’에 출연했다. 김시스터즈가 어머니 이난영과 함께 이 쇼에 출연한지 1년후 비틀즈가 버나드쇼를 통해 미국에 최초로 소개되고 세계적인 록밴드가 됐다고 한다. 이난영은 당시 딸들과 함께 미국에서 댄스를 곁들인 공연에 직접 나서기도 했다.

몸이 아파 귀국한 뒤에도 이난영은 아들 셋을 묶어 ‘김브라더스’를 결성한 뒤 미국에 보내기도 했다. 비록 남성 아이돌 그룹은 실패했지만, 그녀의 실험은 1965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됐다고 한다.

수퍼주니어 일본공연 모습

목포시청 조건형 관광과장은 “바다와 내륙, 강과 바다, 태평양과 서해가 맞닿은 지점의 항구 목포 사람들은 포용력과 창의력을 겸비했다”면서 “그만큼 즐거움과 서정이 넘치는 문화예술 자취가 풍요롭고 사람들의 인심도 좋다”고 말했다. 최초의 걸그룹과 최초의 한류를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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