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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75. 4주같은 ‘4일간의 산티아고’…길에서 무지개를 만나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 +4: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에스테야까지 21.8km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아침부터 빗방울이 떨어져서 우비를 입고 출발한다. 어제 날씨가 화창해서 오늘도 그렇겠거니 했는데,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 중이고 각 마을마다 고저가 다르니 날씨도 장담할 수 없다. 날이 갈수록 날씨에 민감해지고 있다. 어제 처음 걷기 시작했다는 진과 케이와 함께 걷기로 한다.

걷다가 멀리 마을이 보이면 곧 바로 마을로 들어가게 될 줄 알았지만, 멀리 보이는 마을은 적어도 한 두 시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다. 마음이 먼저 도착해 버리면 발걸음에는 더욱 피로가 쌓인다. 아직도 거리 가늠이 덜 되서 일어나는 일이다.



마을에 들어가면 돌로 튼튼히 쌓아올린 집들이 정겹다. 담 모퉁이는 늘 까미노의 화살표가 그려져 있어 더 반갑다.

순례자에겐 걸어서 지나치는 마을이지만 마을주민들은 차가 없으면 이동이 너무나 불편할 것 같다. 21세기의 스페인 농촌마을엔 당연히 주차된 차들도 많다. 저걸 운전하고 가면 천천히 가도 삼십분도 되지 않을 거리를 걷다가 쉬고 발이 아파서 천천히 가다가 주저앉아 발을 주무르기도 하면서 온종일 걸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동차가 전혀 부럽지 않다. 걸으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수만 가지를 자동차 안에서는 하나도 알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운전대를 잡으면 목적지만 중요할 뿐이다. 



내리다 멈추기를 반복하는 비 때문에 우비를 벗을 수가 없다. 남미에서 만난 동행이 주고 간 노란 우비를 쓸 때마다 그녀 생각이 난다. 우비에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에, 문득 안녕을 빌어주던 그 눈빛을 떠올린다. 각자의 인생길을 걷다가 남미의 어디쯤에서 만나 함께 지내고 다시 각자의 길로 멀어져 갔지만 나는 우비를 입을 때마다, 그녀는 헤어질 때 내가 준 엽서를 읽을 때마다 가끔은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지난 며칠 동안의 비에 오늘 내린 비까지 더해져 길은 진흙탕이거나 흙이 씻겨나간 자갈길이다. 발바닥에 지압을 하는 것 같다. 어제도 페르돈 봉우리에서 하산할 때 자갈길이어서 발바닥도 무릎도 엄청 고생했는데 오늘도 발바닥에 불이 난다. 이런 고생은 “사서 고생” 이라고 하는 게 맞지만 아직까진 꽤나 참을 만한 고생이다. 제 아무리 비싼 등산화를 신고 걸어도 이 정도 걸었으면 다른 사람들도 다리가, 무릎이, 발이, 어딘가가 아플 것이다. 까미노 위에 선 사람들이 그들의 나이, 성별, 직업,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다같은 소박한 순례자들인 것이 위안이 된다.



해가 뜨기도 하고 비가 내리기도 하는 일이 반복되는 하늘에 무지개가 걸린다. 걷고 있는 사람들 모두 빨주노초파남보 선명한 무지개를 바라보며 걷는다. 구름이 더 몰려와 무지개가 사라질 때까지 하늘을 보며 걷는다. 내내 비를 뿌리던 하늘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광경은 무지개가 뜨려면 빗방울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대체 그동안의 나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온 것일까? 머리로 이해하던 것을 마음이 알아차리는 일이 왜 이리 더딜까?

걷다 보니 발에 슬슬 통증이 생긴다. 함께 4일째 걷고 있는 케이도 특별히 언급은 없지만 발이 아파올 것이다. 반면 어제 팜플로나에서 산티아고로 출발했다는 진의 발걸음에는 힘이 넘친다. 튼튼한 등산화, 스틱에 등산용 모자와 자켓까지 만반의 준비를 하고 까미노를 걷는 진이 부럽다. 



길옆의 작은 십자가에 눈길이 간다. 까미노를 걷다가 지병으로, 혹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비들을 만나게 된다. 조그만 돌무덤위에 작은 십자가, 이름 모를 그를 추모한다. 지금 이 세상에 없는 돌무덤의 주인이 마지막 본 풍경은 여기 이 자리였을 것이다. 영원히 살 것 같고 계속 걸을 수 있을 것 같아도 삶에도 까미노에도 끝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들길을 걷다보면 시선이 먼 곳에 가 있다. 컴퓨터를, 휴대전화를, 책을 들여다보던 손바닥만 한 시야가 너른 들판을 파노라마로 보고 하늘을 조망하는 넓은 시야로 바뀐다. 먼 산과 지평선을 바라보는 마음이, 얼마 전 남미의 파타고니아에 탄성을 지르던 그것보다 더 여유롭다. 일상에 코 박고 살다가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보게 되었고 거기로 왔을 뿐인데 다른 세상, 아니 다른 삶을 산다. 이런 공간, 이런 시간 속에 살 수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 



마지막 두 시간 동안 비가 내리고 길이 더 질척해져서 이때까지 잘 버텨내던 신발은 오늘도 젖는다. 매일 운동화를 적시고 매일 다시 말리면서, 그래도 이건 최악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걷는다. 젖은 신발에 관한 한, 이런 생각은 4일간의 걸음이 이루어낸 장족의 발전이다.

목적지인 에스테야(Estella)에 도착한다. Estella는 별 혹은 사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수도사들을 위해 프랑스 장인들의 손길로 하나하나 정성들여 만들어졌다는 거리의 조각과 건축물들이 다른 마을과는 사뭇 다르게 멋지다. 



물론 배고프고 지친 순례들에게는 아름다운 거리보다 오늘 비를 피할 알베르게를 찾아 짐을 풀고 메르까도(Mecado) 찾는 것이 우선이다. 비내리는 컴컴한 저녁, 한국인이 세 명이니 저녁엔 장을 봐서 한국식으로 요리를 해먹는다.

요리하고 해야 손쉬운 것들이다. 아로스(Arroz)라고 씌여있는 쌀로 밥을 짓고, 채소가 싸길래 호박과 야채를 사서 알베르게 주방에 남아있는 밀가루와 식용유로 호박전과 부침개를 부친다. 어제 사람들에게 저녁 파스타를 요리해 준 다니엘레는 요리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호박에 밀가루와 계란을 입혀서 전을 부치는 게 신기한지 계속 웃으며 프라이팬 주위를 맴돈다. 어제 함께 알베르게에 묵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넉넉하게 만들어서 나누어 먹는다. 엄마가 해 주시던 호박전과 부침개가 생각나서 한 번 해본 건데 대성공이다. 할 줄 아는 요리도 별로 없는데 부끄럽게도 외국 친구들에게 “오늘은 네가 쉐프”라는 말까지 듣는다.



자주 만나고 식사 함께 하면서 친해지기 시작한 사람들과는 오늘 같은 풍경을 보며 같은 비를 맞고 걸었다는 동질감으로 웃음꽃이 핀다. 메르까도에서 사온 맥주까지 마시면서 코인세탁기에 빨래 돌리는 순서를 기다린다. 한 번에 3유로, 그것도 아까워서 세 사람이 빨래를 함께 돌린다.

이 길 위에서 어떤 걸 보고 느끼게 될지는 예상하지 못해도 4일간의 걸음이 4주일은 지난 듯한 느낌을 준다. 아직도 발이 많이 아프긴 하지만 까미노에서의 이 고통, 이 희열들에 익숙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10시면 불이 꺼지는 알베르게의 침상에서 오늘은 아이패드에 저장해 온 책을 펼칠 만큼 작은 여유도 생긴다. 당연하게도, 몇 장 넘기지도 못한 채 밀려오는 졸음을 떨쳐내기엔 역부족이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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