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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재연 기자의 X파일]위안부 담판 협상에 담긴 ‘외교적 모호성’…韓 체면치레?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위안소의 설치, 위안부의 모집을 하는 자의 관리, 위안소 시설의 축조 및 증강… 등과 관련하여 정부의 관여가 있었던 것이 인정된다. … 정부로서는 국적, 출신지 등을 묻지 않고 소위 종군위안부로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어려운 고난을 겪은 모든 분에게 다시 한 번 충심으로 사과와 반성의 뜻을 말씀드린다”

1992년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내각관방 장관이 발표한 담화문의 일부입니다. 1991년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증언이 처음으로 나온 지 1년 만에 일본이 제시한 답문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내각은 “위안소의 운영에 일본정부가 관여한 것을 증명하는 통달 등은 나왔지만, 여성을 구 일본군이나 정부가 직접, 강제적으로 모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문서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국에 통보했습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피해자 여성들을 만나서 증언을 들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2차 진상 조사 착수에 나선 일본은 다음해인 1993년 한국인 위안부 생존자 16명의 증언을 듣고 일본군의 위안부 소집 관여와 강제연행을 인정하는 고노(河野)담화를 발표했습니다. 

[자료=게티이미지]


위안부 담판 합의의 외교적 의의와 국제정치학적 의의는 조금 다릅니다.

외교적으로 봤을 때 28일 성사된 위안부 합의안은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지 24년 만에 한일 정부가 합의안을 도출했다는 데에 의의가 깊습니다. 특히, 일본이 이번에 지원을 약속한 10억 엔(약 96억 원) 규모의 기금은 지난 1997년 민간을 중심으로 조성된 아시아여성기금보다 공식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때문에 정부는 외교적으로 큰 성사를 거뒀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토 담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현 정권’이 아닌 한국 정부가 이끌어온 위안부 담론의 핵심인 ‘법적 책임’은 결국 모호한 상태로 남겨두게 됐습니다. ‘위안부 최종 타결’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법적 책임을 따지기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1965년 한일 청구협정이라는 체제 하에 한국 정부는 일본이 과거 위안부를 동원했다는 사실에 대해 공식 사과을 얻는 선에서 문제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가간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논하는 공공외교(public diplomacy)적인 시각에서 위안부 담판 합의는 ‘일본의 전쟁범죄 청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피해국가인 한국이 공식적으로 위안부 문제의 최종해결을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구 일본군의 위안부 동원에 ‘책임’을 처음으로 통감하면서 역사인식 개선이라는 메세지를 국제사회에 전달했습니다.

일본 외교전문지 디플로매트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통해 모든 전시 악행이 해결됐다는 일본의 입장을 유지하면서 한국이 체면을 세울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평가했습니다. 한일 정부가 대외적으로 위안부 문제는 ’65년 한일청구권 협정 체제 하에 종료됐음을 공식선언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는 그동안 한국 정부가 주장해온 것과는 상반된 해석이라는 데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9월 국제연합(UN) 총회의 일반토론 연설에서 구 일본군의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해결이 신속하게 마련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에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해결책’을 요구하며 “과거를 인식하지 못한 채로 미래를 개척할 길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가토담화와 고노담화, 그리고 이어진 고이즈미(小泉) 담화와 아베(安倍) 담화에서도 ‘구 일본군의 위안소 설치 및 동원’을 인정하는 인식은 이미 드러나 있습니다. ‘도의적인 책임’이 아닌 ‘책임’을 통감한다는 점에서 위안부 운영의 주체가 일본 정부라는 점을 인정받았지만 법적 책임 여부는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개인 배상은 일본이 위안부 피해자 개인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인정한 것을 의미합니다. 개인 배상은 법원 판결을 통해 이뤄질 수 있습니다. 10억 엔에 달하는 기금이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배상이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또, 일본이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일본이 법적 절차 혹은 공식 채널을 통해 ‘배상’한 것으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이 있습니다. ‘1965년 청구권 협정 체제 하에 일본의 법적 책임은 종결됐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한 모양새입니다.

아베 신조(安倍 晋三) 일본 총리의 공식적인 사과도 기준이 모호합니다.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를 얻을 수 있었지만, 아베는 이날 기자들에게 “우리의 아이나 손자, 그리고 그 앞의 세대에 사죄를 지속하는 숙명을 짊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며 “이번 결의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합의다”고 강조했습니다. 아베 정권이라는 현시적은 정부 주체의 사과로 제한한 것입니다. 전쟁범죄라는 책임에 대한 방법론도 모호하게 남겼습니다.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東京)대학교 명예교수는 29일 아사히(朝日)신문에 “피해자에 어떻게 사죄의 표현을 전할 지 명확하지 않다”고 우려했습니다. 이어 “양 정부가 최종적이고 비가역적인 해결에 합의했지만 실제적인 해결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덧붙였습니다.

어찌됐든 이번 담판으로 한일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마무리하기로 합의했습니다. ’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체제 하에 이룰 수 있는 최대의 외교적 성과라고 양국은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자신의 저서 ‘외교’에 언급했듯, 정부 간 이뤄지는 협상은 가장 모호하고 광범위한 범위에서의 합의를 도출하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그 회색지대 속에서도 ‘국가 이익’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키신저는 강조합니다. 이번 합의문을 통해 양국은 각자의 국가적 이익을 충족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일단 일본은 그래보입니다. 29일 마이니치(每日)신문이 “아베가 자신이 원하는 성과를 얻어냈다”고 보도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한편, 식민역사를 연구하는 한 학자는 익명을 전제로 헤럴드경제에 “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법적 책임과 강제연행이라는 과오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의 오류를 인정해야 한다”며 “하지만 한국 정부에서 과거 체결한 협정을 부정하는 것은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약속 이행에 앞서 왜 일본이 10억 엔(약 97억 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을 동원해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지에 일본 국민에 설명해야 한다”며 “문제는 일본 정부와 언론이 그 역할을 수행할 것이냐의 여부다”고 덧붙였습니다.

이 학자는 “전통외교적 상 양국 정부가 ‘공식 합의’를 얻었다는 의의가 있지만, 공공외교(public diplomacy)적 의미를 따졌을 때 한국 정부는 국제사회에 ‘여론이 반발하면 이에 대한 책임은 한국 정부에 있다’는 메세지를 남겼다”고도 지적했습니다.

/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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