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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79. 침묵의 발걸음…산티아고, 나를 만나는 여정
-까미노 데 산티아고 +8:나바레테에서 나헤라까지 17.9km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까미노의 아침은 마치 단체생활처럼 분주하다. 알베르게는 보통 8시 이전까지는 침대를 비워야 하므로 그렇게 늦게 까지 누워있을 수도 없고 그러려는 사람도 없다. 보통 6시 정도 되면 한 명 두 명 먼저 깨어난 사람의 기척이 느껴진다. 6시 30분쯤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침대로 돌아와서 침낭을 개고 짐을 싼다. 전날 아침거리를 준비한 날은 이른 시간임에도 꾸역꾸역 아침도 먹어둔다. 조용한 가운데 분주한 시간이 아침이다. 7시 30분쯤 알베르게를 나선다.


작은 마을 나바레테의 아기자기한 풍경을 지나 길로 나간다. 알베르게를 나서면 나는 또다시 순례자가 된다. 하루를 걸으며 주어진 대로 먹고 어디서 자게 될 지도 모르지만 마음은 평화롭다. 공식적인 파란 조개나 노란 화살표 말고도 까미노 표시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한 번도 흐트러짐 없이 방향을 안내해주는 표시들이 고맙고, 그려놓은 사람의 손길 또한 감사하다. 까미노를 걸으며 소소하게 감사하며 걷는 일들이 많아진 나 자신에게도 놀라며 걷는다.


황량한 포도밭의 붉은 흙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저 길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상상하게 된다. 길이 그냥 이어지거나, 먼발치로 마을 정도가 보이지 않을까? 나바레테에서 나헤라까지는 약 17.9km, 걷기 시작한 이래 가장 적게 걷는 날이다. 날씨도 좋고 발걸음도 가볍다. 먼 산기슭에 검은 염소떼와 그들을 끌고 가는 목동이 보인다. 그도 이쪽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손을 흔들었더니 멀리서 목동이 답례를 한다. 계속 오르막길로 가다가 고개를 하나 넘고 나서야 나헤라로 가는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이제는 목적지까지의 거리뿐 아니라 그날 걷는 구간의 고저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부턴 내리막길이니 그나마 다리가 편해진다.


가다가 만나는 순례자들의 차림새는 가지각색이다. 나처럼 스틱도 없이 다니기도 하고 케이처럼 등산용의 스틱 두 짝을 잘 잡고 걷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여기서 파는 기다란 막대기를 짚고 진짜 순례자처럼 걷는다. 이렇게 맑은 날은 잔디에서 쉬면서 피크닉이라도 나온 듯 가방에서 도구들을 꺼내 차를 끓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처음 보는 순례자도 지나간다. 까미노는 어디부터 걸어도 상관없으니 중간에 합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하루나 이틀 나보다 빨리 걷기 시작하거나 늦게 까미노에 들어선 사람도 만나게 된다.


이 길을 걷다 사망한 사람의 추모비도 간간이 보인다. 작은 돌무덤 옆에 소박한 말뚝에 조화 한 송이, 그리고 코팅된 그의 사진과 이야기가 있는 추모비는 여느 추모비와는 다르게 만든 이의 자상함이 느껴진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가 살았고 걸었던 흔적이 이렇게 남아있다. 역설적이지만, 죽기 위해 살아야 한다. 멈추기 위해서 걸어야 하는 것처럼. 문득 맞닥뜨리는 죽음은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비교적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헤라(Najera)에 들어온 시각은 오후 1시40분, 까미노 들어와서 가장 빠른 도착이다. 용기를 낸다면 한 마을 정도 더 걷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지만 오늘은 여기서 멈추기로 한다. 시립 알베르게를 찾아가니 오스피탈레로가 아직 도착하지 않는다. 그 앞에 벤치에 앉은 스페인 노인들과 몇 마디하며 기다려 보지만 한 시간을 넘게 햇볕을 쬐며 졸고 있어도 오스파탈레로는 오지 않는다. 뒤에 도착한 이안 할아버지가 여기 말고 다른 사립 알베르게에 가보자고 한다. 워낙 까미노를 잘 아시는 분이라 따라 가서 쾌적한 사립 알베르게에 짐을 푼다. 


나헤라가 큰 도시이고 시에스타 전이라 그런지 사람들도 많다. 레스토랑과 가게들이 몰려있는 골목을 기웃거리다가 한국과 비슷한 전기구이 통닭(?)을 파는 가게를 발견한다. 주인아주머니가 시에스타 시간이 다 되어 온다고 시계를 가리키며 재촉하는 통에 간신히 통닭을 사가지고 나온다. 어제 낮에 햄버거 두 쪽을 셋이 나눠먹고 저녁은 빵으로 때워서 그런지 군침이 마구 고인다. 쾌적한 숙소도 정하고 입맛에 맞는 통닭도 했으니 당연히 맥주를 사서 알베르게로 돌아와 치맥을 먹는다.


알베르게에 들어와서 씻고 나면 자동으로 발에 압박붕대부터 감고 신발도 크록스로 바꾸어 신고 다니니 편하다. 어떻게든 살게 마련이다. 걷기 시작한 지 8일 차, 이만하면 잘 적응하고 있다. 다리가 아픈 것도 웬만큼 적응이 되었다. 어느 정도 걸어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지 시간 가늠도 되고, 발 아픔과 허기보다 진짜 내가 해야 할 생각들이 자연스레 떠오르기도 한다. “까미노데산티아고”라는 쉽지 않은 여정에 들어오고 싶어 했던 초심을 되뇌게 된다. 시간에 나를 맡기는 게 아니라 발걸음에 스스로를 맡기기로 한다. 조바심 내지 말고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가야겠다. 이 걸음이 끝날 때 주어지는 순례자 증명서보다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운 나를 선물할 수 있길 바라게 된다. 


강변에 하나 둘, 불이 켜진다. 토요일이라서인지 강변 노천카페엔 사람들이 많다. 오늘처럼 빨리 도착할 수 있다면 이제 걷는 거리를 늘려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연일 날씨도 화창하고 걸음도 빨라졌다. 가다 보면 아는 얼굴들은 비슷비슷하게 만나게 된다. 오늘은 처음 며칠간 만나던 캐나다와 영국 노부부를 여기 알베르게에서 다시 만났다. 걷는 거리가 조금씩 다르고 같은 마을이라도 다른 곳에 묵으니 못 만났던 것이다.

사설 알베르게라 주방 시설이 전자레인지 정도밖에 없어서 다들 저녁을 만들어 먹지 않고 사 먹고 들어오는 분위기다. 서너 시쯤 치맥을 먹은 우리는 슈퍼를 찾아 내일 아침거리와 맥주, 과자를 사가지고 들어온다. 좁은 식당에 앉아 맥주 한 캔을 들고는 옆에 앉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알베르게는 10시까진 들어와야 하기도 하고 어차피 순례자들의 숙소라 걸음에 지친 사람들이 밤늦게까지 놀지도 않아서 10시 정도 되면 한밤중 같은 분위기가 연출된다. 지금까지는 그게 가능했었다. 그런데 여기 나헤라는 큰 도시인 데다가 오늘이 토요일이라서인지 늦은 밤 도시의 소음, 밤새 술에 취한 사람들의 소리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한다.
걷는 동안에는 말이 없어지고 생각이 많아진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풀이 바람에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싱그러운 바람을 맞으며 발이 아프다고 느낄 때도, 혹은 주위의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깊은 생각에만 빠져 그저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도 순례자들은 묵묵히 걷고 있었다.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도록 걸을 때에는 이런 식의 무자비한 소음을 상상하지 못했다. 까미노를 걷다 보니 도시인들이 스트레스를 푸는 이런 왁자지껄 한 밤을 깜빡 잊었던 것이다. 까미노를 걷는 동안 내가 배운 것이 침묵이었다는 것을 술에 취한 사람들의 요란한 소리를 밤새 들으며 깨우친다. 걸음을 아름답게 하는 것 중 하나는 침묵이었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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