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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슈퍼리치]잘나가는 그녀들, 젠더리스 룩에 빠지다
[헤럴드경제=슈퍼리치팀 천예선 기자] “회색 레인코트 깃을 바짝 세우고 하이힐 뒤축을 대리석 로비에 꽂아라. 최대한 무심하고 시크하게….”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드라마 ‘섹스 앤더 시티’, 소설 ‘제인 스프링 다이어리’ 등으로 계보를 잇는 사랑받는 여성의 표상이다. 유능하고 친절한데다 섹시하기까지 하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지적(知的)인 여성들이 마놀로 블라닉, 지미 추 구두라면 영혼마저 팔 것처럼 달려든다.

그러나 최근 반전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다. 미(美)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요염하고 귀여운 새끼 고양이 대신 ‘호랑이’가 되겠다는 여성들이 늘면서다.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다시 패션이고, 기수는 명품 브랜드다. 

남성복 스타일의 최고 장점은 효율성과 합리성이다. 여 성복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소재가 상대적으로 두껍고 견고하다. . 무엇보다 활동하기 편하다. 사진은 왼쪽
부터 기네스 펠트로,엘리자베스 홈즈,엠마왓슨.

▶명품이 ‘끌고’=명품업계에 ‘젠더리스(Genderless)’ 바람이 거세지고 있다. 젠더리스란 성(性) 구별이 없는 중성적이라는 뜻으로, 여성과 남성의 양성적인 면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대표적인 예가 구찌(GUCCI).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패션업계에서 젠더리스 룩을 이끌고 있는 인물로 평가된다. 미켈레는 최근 패션쇼에서 남성모델들에 자수가 들어간 수트나 중년여성이 입을 법한 목에 리본 달린 블라우스를 입히기도 하고, 어린 여성 모델에게는 남성수트나 털방울 달린 모자 혹은 괴짜 안경을 씌워 등장시켰다.

이같은 미켈레의 젠더리스 실험은 유럽시장에서 구찌 판매량을 13% 끌어올리는데 일조했다. 영국 유력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켈레가 보수적인 럭셔리 브랜드를 행동하게 만들었다”며 “젠더리스 룩은 명품업계에 점진적으로 스며들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10월 갑자기 디올을 떠나 충격을 준 벨기에 출신의 라프 시몬스는 여성성의 전통적인 이미지를 모더니즘적인 관점으로 해석해 파격적인 디자인 여성 컬렉션을 선보여 화제가 됐다. 디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하는 동안 가정주부를 연상시키는 우아하고 화려한 여성복을 특유의 미니멀리스트 감각으로 전문성 있게 변모시켰다. 덕분에 디올의 판매실적은 60% 급증했다. 특히 2014년 크리스찬 디올 쿠튀드(최고급 맞춤복) 수익은 전년대비 18% 오른 19억4000만달러를 기록했다.

노골적으로 남성복을 입은 여인을 좋아하는 남성 디자이너도 있다. 터키 출신의 디자이너 우미트 베난은 2013년 ‘나는 한때 남성복을 입은 여인을 사랑했었다(I once loved a woman who loves menswear)’는 주제로 컬렉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 무대에서 그는 통이 넓은 바지 등 남성 수트를 입힌 여성 모델을 등장시켰다.

루이비통 역시 성(性)역 파괴에 동참했다. 할리우드 배우 윌 스미스의 아들인 제이든 스미스(17)를 새로운 여성복 광고모델로 기용했다. 제이든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스커트 위에 가죽재킷을 입고 여성모델들 사이에 섰다. 업계에서는 “루이비통의 시도가 남성을 여성복 코너로 가게 하긴 힘들겠지만, 여성이 남성복 코너에 머물게 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여성들이 남성복 코너에서 자신의 옷을 고르는 기현상은 2000년대 들어 본격 확산했다. 디올 옴므(Dior Homme(남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에디 슬리먼은 남성성에 갇힌 남성복의 한계를 뛰어넘는데 앞장섰다. 그는 남성들 사이에 스키니 유행을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슬리먼은 2012년 생 로랑(Saint Laurent)으로 자리를 옮겨 파리총괄 디렉터로 활약했다. 브랜드 이름을 ‘입 생 로랑’에서 ‘생 로랑’으로 바꾸는 것을 주도한 슬리먼은 지난해 파리 남녀 컬렉션에서 경계를 허문 ‘락(Rock) 스타일’을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안젤리나 졸리

▶셀럽이 ‘밀고’=젠더리스 룩은 세계적인 셀러브리티(유명 연예인ㆍ이하 셀럽)들이 합류하면서 더욱 탄력을 받고 있다.

중성적인 패션 스타일의 대표주자로는 틸다 스윈튼(55)이 꼽힌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틀니를 끼고 메이슨 총리로 분해 국내 팬들에게 더 잘 알려진 틸다 스윈튼에게는 ‘외계인, 카멜레온, 중성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스윈튼은 영화제 레드카펫이나 패션쇼에도 과감하고 대담한 남성복 스타일을 선보인다. 설국열차 홍보차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특유의 숏커트에 흰색 재킷과 발목까지 오는 짧은 검은색 바지를 입었다. 스윈튼은 자신의 패션 스타일을 묻는 질문에 “나는 본능에 따른다”며 “연출법은 매우 쉽다(Super easy). 먼저 마스카라부터 지우라”고 말했다.

스코틀랜드 귀족 가문 출신인 틸다 스윈튼은 캠브리지 대학에서 문학과 사회학, 정치학을 공부했다. 대학에서 연극무대에 오른 것이 계기가 돼 졸업한 후 본격적인 연기활동에 뛰어들었다. 자유로운 영혼과 파격적인 연기로 1990년대 ‘아방가르드의 그레타 가르보(미국 유명 여배우)’라는 닉네임으로 붙리기도 했다. 스윈튼의 자산은 1000만달러(약 120억원)로 평가된다.

영화 ‘트와일라이트’ 시리즈 여주인공 크리스틴 스튜어트(25) 역시 여성성과 중성성을 넘나드는 젊은 배우로 꼽힌다. 자산 7000만달러(840억원)를 보유한 스튜어트는 지난해 뉴욕에서 열린 디자이너 스텔라 매카트니(비틀즈 멤버 폴 매카트니의 둘째딸)의 가을 패션쇼에 블랙 수트를 입고 등장해 화제가 됐다. 미 연예 매체들은 이와 관련 “스튜어트가 엘렌 페이지에서 조디 포스터, 엘렌 드레제네스로 이어지는 남성복에서 영감을 받은 의상을 입는 셀러브리티 무리에 동참했다”고 전했다.

미국에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있다면 영국엔 엠마 왓슨(25)이 있다. 영화 ‘해리포터’ 히로인인 왓슨은 일찌감치 미소년 같은 중성적인 매력을 발산해왔다. 2010년에는 숏커트로 머리카락을 잘라 팬들을 놀라게 했다. 왓슨은 그러나 자신의 페이스북에 “정말 자유를 얻은 기분”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이밖에도 2014년에는 미 CBS방송 프로그램 ‘레이트 쇼 Late Show’에 깔끔한 블랙정장으로 출연해 눈길을 끌었다. 왓슨의 순자산은 7000만달러(840억원)로 추산된다.

영국의 패션 아이콘인 빅토리아 베컴(41)은 지난해 중성적인 패션 스타일의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려 720만명의 팔로워를 놀라게 했다. 까슬거리는 소재의 흰색 셔츠 단추를 가슴까지 풀고 그 위를 검은색 멜빵이 지나가는 중성적인 룩을 선보였다. 이전에는 그동안 고수하던 하이힐에서도 내려와 플랫 슈즈를 신어 패션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빅토리아 베컴의 자산은 3억달러(3600억원)으로 평가된다.

▶스마트한 여성이 남성복을 선호하는 까닭=여성성이 극대화된 옷(hyper femininity)을 선호하지 않는 여성들에게는 몇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지적(知的)이고 독립적이며 개성이 강하다’는 것. 일례로 미국 ‘바이오벤처 신화’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홈즈(31) 테라노스(Theronos) 창업주는 독특한 패션 스타일로 유명하다. 홈즈는 공식행사에 어김없이 검은색 수트와 터틀넥(거북목처럼 생긴 목라인) 상의를 입고 등장한다. 고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주를 존경하는 이유 외에도 오직 일에 몰두해야 하기 때문에 매일 아침 무엇을 입어야 할 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나름의 패션 철학이 반영됐다.

이처럼 남성복 스타일의 최고 장점은 효율성과 합리성이다. 여성복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소재가 상대적으로 두껍고 견고하다. 게다가 전형적인 여성복처럼 핸드백이나 액세서리, 색상 등을 맞춰 입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다. 무엇보다 활동하기 편하다.

업계에서는 여성들이 남성복에 관심을 보이게 된 이유에 대해 남성복 시장이 여성복 시장보다 더 역동적으로 커지고 있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라고 분석한다. 시장 성장세에 맞춰 다양한 스타일의 남성복을 구현해내면서 여성 고객들의 눈에 띌 만한 작고 몸매를 드러내는 옷이 많이 출시되고 있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역사적으로 여성이 세상과 맞서는 방법을 보면 빠르게 ‘숙녀’가 되거나 중성적인 ‘톰보이’가 되는 방법이 있다”며 “지적인 여성일수록 독립적인 성향이 강해 일부러 남성들에 여성성을 드러내는 옷은 자제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성적인 매력에 기대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여성은 정당하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돼 왔다. 오로지 여성이라는 매력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상대에게 ‘간택’되길 기다리는 시대는 지났다는 것이다.

한 젠더 전문가는 “스마트한 여성은 생물학적인 성이라는 특유의 매력에 대해 진부하고 지루하게 느낀다”며 “자신의 여성성을 패션으로 한번 더 쐐기를 박느니 경계를 넘어서는 중성적인 룩으로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로움과 여유로운 자신감을 드러내고자 한다”고 말했다.
 
che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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