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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후 10년 만의 私的대화…‘정보무당’ 백남준과 마주하다
갤러리현대, 백남준 10주기 재조명展

쓰러지기전 만든 ‘잡동사니 벽’국내 첫선
TV 로봇시리즈 포함 40여점 공개
전시작 대부분 개인소장품 ‘무료 관람’
“백남준 예술은 대중적 우상 해체작업”
이용우 관장 “추모전 새 연구 계기 되길”


“내가 백남준 이 사람을 따라다녔다간 아무 것도 못하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천재였죠.”

한국을 대표하는 추상화가 윤명로의 백남준(1932-2006)에 대한 기억이다.

프랑스의 천재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이 루마니아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1876-1957)의 재능을 알아보고 “내 조수로 일하지 않겠나” 제안했을 때, 브랑쿠시는 “큰 나무 아래서는 성장할 수 없다”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윤명로 화백은 이 일화에 빗대어 백남준을 기억했다.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천재였다고.

1990년 7월 20일 현대화랑 뒷마당(현 금호미술관 자리)에서 열렸던 요셉 보이스를 추모하며 펼쳤던 진혼굿 퍼포먼스‘ 늑대 걸음으로’ 자료 사진. 오른쪽 사진은 이번 추모전에서 국내 처음 선보인 비디오 설치작품‘ 잡동사니 벽(1995)’.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윤 화백은 197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 주목받고 있던 전위 예술가 백남준을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한 인물이다. 1969년 뉴욕프랫그래픽센터에서 판화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간 윤명로는 워즈아일랜드로 가는 어느 다리 위에서 백남준을 만났다. 그는 봉투에 마른 멸치를 넣고 바다로 던지는 행위 예술을 하고 있었다.

윤 화백은 백남준에 대한 강렬했던 첫인상을 잊지 못했다. ‘물고기 소나타(Fish Sonata)’라는 타이틀의 퍼포먼스에 쓰였던 멸치를 받아와 액자 속에 넣어 고이 간직했고, 지금도 자택 한쪽 벽면에 걸어두고 있다고 했다.

1978년 윤 화백은 신동아 잡지에 최초로 예술가 백남준에 대한 기고를 실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한국인들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아티스트 백남준을 처음으로 인지하게 됐다.

이용우 상하이 히말라야미술관 관장은 “이 때부터 한국인들이 우리도 세계적인 예술가가 있다는 자긍심을 갖게 됐고, 본격적으로 백남준의 예술적 토대를 공부하는 시대가 열리게 됐다”고 정의했다.

이어 1983년 박명자 현대화랑 회장, 정기용 전 원화랑 대표, 그리고 이용우 관장 등 당시 미술계 주요 인사들이 처음으로 백남준을 만났고, 이듬해인 1984년 1월 1일(뉴욕시간), 한국 시간으로는 2일 새벽 2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KBS를 통해 전국 안방극장으로 생중계되기에 이르렀다. 기념비적인 인공위성 ‘우주쇼’였다.

백남준의 한국 첫 개인전이 열린 건 1988년 현대화랑이었다. ‘응팔’의 해 쌍문동엔 ‘덕선이 가족’이 있었지만, 한국 미술계는 백남준이라는 세기의 아이콘을 갖게 됐다. 이후 현대화랑은 1990년, 1992년, 1995년, 2007년까지 총 다섯차례 백남준 개인전을 치르며 인연을 이어갔다.

2016년 1월 29일. 백남준 10주기를 맞는 날이다. 국내 미술계는 백남준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가장 먼저 스타트를 끊은 건 현대화랑이다. ‘백남준 작고 10주기 추모 전시’가 1월 28일부터 4월 3일까지 열린다. TV 로봇 시리즈를 비롯한 비디오 조각 작품 및 평면 작품 약 40점을 갤러리 본관(현대화랑)과 신관(갤러리현대)에서 선보인다. 이 중 ‘잡동사니 벽(Junk Wall)’은 국내 최초로 공개되는 비디오 설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백남준이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인 1995년, 독일 볼프스부르그 미술관에서 열렸던 마지막 대규모 개인전에서 선보인 바 있다.

작품 유지, 보수 및 운반 등이 까다로운 백남준의 대표작들을 한자리에 모은 이 전시를 미술관이 아닌 상업갤러리가 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작품들은 대부분 개인 소장가로부터 가져 왔다. 대부분 판매가 불가능한 작품인데, 전시 관람료도 없다. 상업화랑으로선 ‘돈 안 되는’ 전시다.

조정열 갤러리현대 대표는 “설치, 운반비 등이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갤러리가 작가와 각별한 인연이 있고, 또 갤러리의 명성에 도움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시 오프닝이 열렸던 28일, 내로라하는 국내 미술계 주요 인사들이 대거 운집해 백남준을 추모했다. 박명자 회장, 이용우 관장, 김동호 전 문화융성위원장, 박래경 큐레이터협회 명예회장, 박만우 전 백남준아트센터 관장, 홍라영 리움미술관 부관장,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 윤범모 가천대 교수를 포함, 김창열, 이우환, 정상화, 박서보, 윤명로 등 원로 화백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

특히 90세 나이를 바라보는 김창열 화백은 백남준의 1960년대 초 퍼포먼스를 재연해 눈길을 끌었다. 바이올린을 줄에 달아 바닥에 끌고가는 ‘걸음을 위한 선(1963)’에 이어 바닥에 내리쳐 부수는 ‘바이올린 독주(One for Violinㆍ1962)’를 선보였다.

한편 10주기를 계기로 백남준은 재조명받을 수 있을까. 다음은 이용우 관장의 말이다.

“백남준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10년 전보다 퇴보한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시장의 문제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가 시장성 강한 예술가인가요. 백남준의 매체(Media) 확장은 엄청난 연구 분야입니다. 그가 뱉어냈던 다양한 예술 언어들은 다시 조명돼야 합니다. 백남준이 현대사회를 진단하는 미학적 언어들은 정보사회를 향한 공격에서 시작됐습니다. 대중 아이콘인 텔레비전을 이용한 그의 예술은 ‘대중적 우상에 대한 해체’ 작업이었죠. 흔히 백남준을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라는 부르지만, 저는 그를 정보 해석에 탁월했던 ‘정보 해설사’, ‘정보 무당’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이 자리가 단순히 추모를 위한 것이 아닌, 정보 무당 백남준을 새롭게 연구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김아미 기자/ami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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