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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86. 한 걸음 옮길때마다 찌릿찌릿…그래도 걸을 수 밖에…
-까미노 데 산티아고 +15:까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서 사아군까지 38.9km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지친 순례자의 마음에 커다란 위로를 주신 수녀님들을 뒤로 하고 까리온데로스콘데스의 성당 알베르게를 나온다. 기억에 오래 남을 곳이라 따뜻한 마음으로 떠나게 된다. 걷기 시작한지도 보름이 지났다. 눈길을 걸으며 시작한 까미노인데 이젠 봄이 완연하다. 연분홍 꽃과 연둣빛 나무, 청록색 물빛이 그윽한 봄의 향기를 전해준다.



마을마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표지들이 널려있다. 이 방향으로 가면 된다는 메시지가 끊임없이 주어져서 목적지 산티아고를 항상 생각하게 한다. 화살표가 없는 길은 그냥 계속 걸어가면 된다. 이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 방향으로 가면 궁극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은 걸음을 내딛게 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 까미노처럼 삶에도 이런 표지가 있다면, 나는 다른 곳에 정신 팔려 보지 못하고 지나친 건 아닐까? 한눈팔지 않고 표지를 따라가는 삶은 후회가 없을 것인가? 하루에도 수십 번 까미노 표지들을 만날 때면 드는 생각이다. 이 길을 걷는 것도 결국 삶의 일부이기 때문인지, 생각은 돌고 돈다.



마을을 빠져나오는 정도는 워밍업이다. 오늘의 걷기는 지금부터다. 걷는 것이 일상이지만 하루도 같은 풍경인 날이 없고 같은 생각을 하는 날이 없다. 아픈 발 조차도 상태가 날마다 달라지니까.

메세타의 평원지대가 계속해서 펼쳐진다. 오늘 길은 가로수가 있어서 그나마 단조로움을 덜해주고 작은 그늘이라도 만들어 준다. 양 옆은 가도 가도 끝없는 밀밭이라더니, “끝”을 생각하는 것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그저 건조한 길 위를 걸을 뿐. 끝은 너무나 멀다. 



마을도 없는 들판이 17km 정도를 이어진다. 가로수도 사라진 길, 시야에는 지평선만 가득하다. 시선은 나도 모르게 아득히 먼 곳을 향한다. 요 며칠은 지평선을 실컷 바라본다. 자전거나 자동차가 다니는 차도와 밀밭 사이에 순례자를 위한 흙길이 있다. 보행자 도로를 따라 아스팔트 길을 만든 건지, 차도 옆에 순례길을 조성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스팔트 위 풍경보다 보행자길을 걷는 풍경이 더 좋다.



어느 순례자가 돌에 낙서를 하고 올려두고 갔다. “A PASSO LENTO”라는 말이 스페인어인지 포르투갈어인지 이탈리아어인지는 몰라도 천천히 걸으라는 뜻으로 읽힌다. 말이 가진 명확한 의미보다 걷다가 주저앉아 돌멩이에 글을 써서 조심스레 올려놓고 미소 지었을 그 순례자의 마음이 읽힌다.

알베르게에서 초간단 아침을 만들어 먹고 걷다가 마을이 나오면 화장실도 이용할 겸 바(Bar)에 들어가 까페콘레체 한 잔을 마신다. 점심은 쉬면서 초콜릿이나 바나나로 가볍게 요기만 하는 정도다. 많이 먹지 않는 게 걷기에 편하다는 것을 2주일쯤 걷고 나니 알겠다.

거의 25km 넘게 걷고 난 지점부터는 발이 몹시 아프다. 양쪽 발가락에 모두 물집이 잡혀서 퉁퉁 부어있다. 신발에 발을 넣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런 상태로 무거운 짐을 견디면서 걷는 것은 거의 고행이다.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진다. 앞서가면서 마을에서 날 기다리던 케이와 만난다. 케이는 발에 무리가 없어 잘 걷고 있다. 오늘의 목적지 사아군(Sahagun)에서 만나기로 하고 케이는 먼저 떠난다.

3월이지만 낮에는 바람막이 점퍼를 배낭에 넣고 티셔츠만 입고 걸어도 덥다. 마을을 나오기 전 쉼터에서 오래 앉아 있게 된다. 이젠 쉴 곳도 없다고 한다. 모자를 벗어 던지고 양말까지 벗고 바람을 맞는다. 부을 대로 부은 발과 무거운 배낭, 한숨이 나온다. 게다가 길 위에는 순례자도 한 명 보이지 않는다. 오롯이 혼자 가야 하는 길이다.



자갈을 모아 만든 화살표들이 도로에 이어져 있다. 여기쯤 걷는 사람들은 전체 여정의 반 정도, 이주일 정도 걸은 사람들이다. 먼저 걸어간 케이의 발도 지치고 있을 것이다. 총 400km 이상을 걸어왔는데 어디든 아프지 않다면 그게 거짓말이다. 지금 내 고통이 커서 남의 아픔을 느끼지 못할 뿐인 것이다. 걷기에 지친 누군가가 만들었을 돌무더기 화살표가 애잔하면서 익살스러워서 어렵게 걸으면서도 픽 웃음이 난다. 만든 사람, 보면서 지나가는 사람 모두 동병상련, 이심전심이다.



‘삶은 계속 되니까 수많은 풍경 속을 혼자 걸어가는 걸 두려워했을 뿐. 하지만 이제 알아 혼자 비바람 속을 걸어갈 수 있어야 했던 걸….’ - 이상은 노래 <삶은 여행>중에서

​아직은 기운이 있어서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는다. “수많은 풍경 속을 혼자 걸어가는 나”와 “그걸 두려워했을 뿐”이라는 가사가 이 상황과 절묘하게 들어맞는다. “혼자 비바람 속을 걸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구절은 뼈저리게 가슴에 와 닿는다. 정오를 한참 지난 태양은 대지를 달군다. 덥고 힘들다.

점점 길이 울퉁불퉁해져서 신발이 견뎌내질 못한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발가락들이 퉁퉁 부어올라 얇은 트레킹화 속에서 찌그러질 때마다 진물이 양말을 적신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마을이라도 나오면 다른 생각이라도 해 볼 여유가 있겠는데 길만 끝없이 이어진다.

보행자 도로 옆 고속도로의 표지판에 사아군까지 6km가 남았다고 표시된다. 힘을 내본다. 하지만 이곳에 표시된 6km는 자동차를 위한 것이다. 대도시로 들어가는 인터체인지로는 보행자가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도로 아래로 연결된 보행자용 길을 따라 멀리 돌아서 사군으로 방향을 잡게 된다. 아까 우연히 본 6km 표지판이 원망스럽다. 목적지에 가까이 왔지만 둘러서 가야 하기에 길은 훨씬 멀다. 이제 발은, 내 발이 아닌 것 같다.



발에서 물집이 펑펑 터지고 다리는 아예 감각이 없다. 더 이상 갈 수 없을 것 같은데 해는 저물어가고 멈출 곳이 없어서 걸을 수밖에 없다. 남은 거리를 기다시피 걷는다. 하나 둘 셋 넷 걸음을 세어보기도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못 갈 것 같다. 계속 가면 도착한다는 것을 아는 머리는 저만큼 앞서 걷고 있는데 발이 말을 듣지 않는다. 혼자 걷는 이 길이 외롭고 처량해서가 아니라 아파서 눈물이 난다. 한 번 터진 눈물은 멈추질 않는다. 옆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울지도 못했을 테니 그게 불행 중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해는 저물어가고 마음은 급해지는데 100m쯤 가다 주저앉고 다시 200m쯤 가다 서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느릿느릿 걸어도 고통은 사그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한다. 오랜 시간을 천천히 걸었는데 이 풍경 속에는 오직 나 하나뿐이다. 게다가 쉴 곳도 없다. 걸을 수밖에 방법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아파도 걸을 수밖에 없다. 도저히 못 갈 것 같은데도 한 발자국을 내딛으면 그만큼은 전진하고 있다.



겨우겨우 사아군에 도착하니 7시가 다 된 시각이다. 하긴 그렇게 많이 쉬고 그렇게 천천히 걸었으니 시간이 그리 된 것도 당연하다. 이젠 해가 질까 봐 걱정이 돼서 시내에 들어서고는 마음을 다잡고 걷는다. 아무래도 포장된 길이라 걷는 발이 좀 낫게 느껴져서 더 열심히 걷는다. 지칠 대로 지친 내 몰골은 완전한 순례자의 그것이다.

대도시답게 알베르게도 많아서 케이와 만나기로 약속한 시립알베르게의 이정표만 따라 걷는다. 잃어버린 화살표에 망연자실하며 길을 물으려 돌아서는데 낯익은 등짝이 보인다. 두 시간이나 먼저 도착한 케이가 거리에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먼저 도착해보니 시립알베르게를 찾기가 힘들었다며 시간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내가 헤맬까 봐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까미노를 걸으며 너무 친해져서 친동생보다 더 많이 “누나, 누나!” 불러주는 케이지만, 거기서 기다려 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에 그 마음이 고맙고 예뻐서 울컥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케이 덕분에 힘들게 찾아갈 뻔했던 알베르게로 쉽게 가서 등록을 한다. 여기도 대도시라 대형마트 디아(Dia)가 있다. 거의 서있을 수도 없을 지경인데 먹기는 해야겠기에 빨리 씻고 발을 치료하고 나서 디아에 가서 장을 봐서는 돌아온다. 호박전과 계란 프라이, 우리가 좋아하는 맥주 산미구엘이 저녁 메뉴다.

알베르게의 주방에는 다니엘레가 까미노에서 만난 여자 친구랑 웃고 떠들고 있다. 메세타의 끝없는 길이 재미없다고 버스 타고 왔다는 것이다. 너는 버스 탔냐며 난 오늘 걷느라 너무 힘들다고 했더니 조용해진다. 장난으로 눈을 흘기며 붕대를 풀어 내 발을 보여주니까 이번엔 놀라서 얼굴 표정이 바뀐다. 발이고 다리고 다 아파서 죽을 지경인데도 그 발로 장난치며 웃고 있는 내 모습이 기이하다. 사실 버스 탔다는 건장한 다니엘레가 얄밉기도 한데, 생각해보면 그가 왜 얄미워야 하는 지도 모르겠다. 버스를 타는 것도, 나처럼 미련할 지경으로 걷는 것도 각자의 선택일 뿐이다. 나는 내 까미노의 기준만 충족하면 그뿐이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걸음을 끝냈다는 것으로 감사하기로 한다.



케이와 음식을 먹고 있는 중에 알베르게가 소란스러워진다. 어두워진 후에 독일 여자 매기가 들어오고 나서다. 심각한 상황인 듯 사복경찰이과 순례자가 아닌 현지인들이 다녀가고 알베르게 안의 사람들이 웅성댄다. 무슨 큰 일이 있는 것 같다. 나중에 매기에게 들어보니 사아군에 들어올 때 걷다가 어두워져서 히치하이크를 하려 했다고 한다. 승용차가 한 대 와서 섰고 처지를 설명하고 차를 얻어 타려는데 인적도 없는 그 길에서 운전자가 성추행을 했다는 것이다. 매기는 깜짝 놀라 저항하며 도망쳤고 사아군 알베르게에 들어와 자동차 번호를 경찰에 신고를 한 것이다.

순례자들이 그녀를 더욱 안쓰러워하는 것은 모두가 지나온 길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사람 한 번 못 만나고 울며 걸었던 길이어서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의외로 의연한 매기는 주방에 있는 순례자들이 침대로 다 들어가고 나서도 한참 동안 남아 우리와 이야기를 나눈다. 발 때문에 나도 힘든 하루였지만 그녀에 비할 바가 아니다. 들어보니 매기는 특이하게도 무전여행으로 까미노를 걷고 있다. 미술을 전공한 그녀는 까미노를 걸으며 사람들에게 그림을 그려주고 돈을 번다. 바(Bar)나 알베르게에서도 그런 식으로 공짜로 숙식을 해결한다고 한다. 6개 국어를 구사한다는 그녀는 인도 여행에서 우연히 짐을 모두 잃어버린 후, 돈이 없어도 여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매기가 오늘의 사고에 의연히 대처하고 있는 것은 그런 경험의 깊이이기도 한 것이다. 매기를 위로해 주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른 날보다 더 늦게 잠자리에 든다.

나만 힘든 것 같았던 오늘이지만, 매기는 매기의 몫만큼, 케이는 케이의 분량만큼 쉽지 않은 하루였을 것이다. 큰 사고 없이 걸음을 지속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이런 저런 발자국들로 각자의 산티아고 길이 완성되는 것임을, 멈추지 않고 한 발자국을 옮기면 그 발자국들이 모여 목적지에 이르게 됨을 깨닫게 된다. 멈추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걸 몸소 체험한 오늘이지만, 발의 상태는 내일을 버틸 수 있을까 걱정스러운 지경이다.



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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