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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91. 해발 1150m 마을…하늘의 별이 잡힐 듯
-까미노 데 산티아고 +20:아스또르가에서 라바날 델 까미노까지 20.6km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도미토리 바닥에 주저앉은 하루까는 배낭 속의 물건들을 하나 가득 어질러 놓고는 어쩔 줄을 모른다. 곧 출발해야 하는데 짐을 싸기는 커녕 자꾸 늘어놓기만 한다. 그녀의 배낭에서 기다란 멀티콘센트가 나오고 세탁기용 1회용 액체세제들이 쏟아져 나온다. 어쩐지 어제 걸으면서 내내 나에게 어깨를 보여주며 어깨가 아프다고 했었다. 걷는 내내 무거운 배낭을 들고 다니다 산티아고 우체국으로 부친 지 삼일째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저런 쓸데없는 것들을 지고 다니니까 배낭이 무겁고 어깨가 아픈 것이다. 필요 없는 건 과감히 두고 가라고 충고를 하니까 일단 멀티탭을 쓰레기통으로 던지는데 그 모습 때문에 다들 웃는다. 까미노에선 짐이 최대의 적이란 걸 하루까 말고는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하루까와 함께 걷기로 했다. 아스또르가의 아름다운 아침 풍경 속을 함께 걷는다. 아픈 발도 많이 나았고 어제 스틱도 하나 샀기 때문에 내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하루까가 가리키는 손끝에는 “주교의 궁(Palacio Episcopal)”이라는 동화속의 성 같은 건축물이 있다. 스페인의 거장 가우디의 자취를 만난다.
주교의 궁 옆에는 중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성당이 있고, 조금 더 걷다 보면 현대적인 성당도 만날 수 있다. 현지인들은 어느 성당이 더 좋을까? 편리하고 쾌적하기로는 현대식 성당이 좋을 테고 옛 성당은 그 기품 속에 마음의 평화가 깃들 것 같다. 순례자의 지나친 감상일까?


처음 보는 길가의 노란 철제 십자가 가운데 조가비 모양이 이곳이 까미노임을 알려준다. 아직 빨리 걷는 것은 무리지만 발걸음이 한결 부드럽다. 아스또르가를 다 빠져나오고 난 후에 케이가 앞서가고 그 다음엔 하루까가 속도를 높인다. 속도를 맞추려고 애쓰지 않는 것은 서로에게 좋다. 각자의 속도만큼 걷는 것이다.
작은 마을의 소박한 교회를 지난다. 각국의 언어로 글을 써 놓았는데 한글로도 글이 쓰여 있다. 이 작은 교회를 지나서 걷다가 하루까를 잃어버린다. 잘못된 길을 깨닫고 돌아오게 될 그녀의 세 번째 날의 까미노는 또다시 힘들게 생겼다. 그러나 큰 걱정은 되지 않는다. 조금 고생은 하겠지만 어떻게든 올바른 길을 찾아 올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녀의 오늘 까미노인 것이다.


먼 산 아래 그림처럼 이어진 길에 이정표가 나타난다. 계속 오르는 길이긴 하지만 이미 높은 고도에서 출발했으니 많이 어렵진 않을 것이다. 해발 850m에서 출발해서 본격적으로 산에 오르기 전 해발 1150m로 고도를 높여 라바날데까미노에서 묵을 것이다. 그리고 내일 다시 해발 1150m에서 출발해서 1500m인 봉우리를 넘을 예정이다.
​아스또르가를 나서서 만나는 첫 마을은 작지만 그만큼 아기자기하고 깨끗하다. 최근 일주일 중에 가장 컨디션이 좋은 날이다.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상쾌하다. 케이는 앞서 떠나고 하루까는 어딘가로 사려져 버렸으니 이제 남은 길은 혼자다.


한없는 밀밭과 지평선을 바라보며 걷던 메세타의 고위평탄면은 끝났다. 지금부터는 레온 산맥을 향해 오르는 길이다. 선의 끝에 점이 있다는 기초도형의 정의처럼,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그동안 걸어온 여정의 마지막 발걸음이 된다. 그 발걸음이 모여 오늘의 이동거리를 선으로 잇는다. 일반적인 여행에서 그 목적지가가 중요하다면, 도보여행은 어떻게 가야 하는지 과정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그것은 시간과도 상관이 있다. 이처럼 느린 걸음, 먼 산의 만년설을 바라보며 걷다가 잡초 사이의 들꽃을 발견하고 잠시 서서 감탄하는 발걸음은 빠르지 않아도 충분히 좋다. 파란 하늘에는 솜사탕 같은 작은 구름이 여행을 하고 있고 시선의 끝에는 지평선이 아니라 만년설을 이고 있는 산이 있다.


케이는 날아가듯 걸어가고 하루까는 잘못된 발걸음을 되돌릴 시각, 나는 바(Bar)에 들어간다. 원래 커피는 아메리카노를 즐기는데, 산티아고길에서는 늘 부드러운 까페콘레체를 주문하게 된다. 광고를 흉내내면, “걷다가 즐기는 까페콘레체 한 잔의 여유”다. 모자를 벗어두고 땀을 식히며 마시 부드러운 달콤함은 까미노의 추억이 되고 있다.
​멀리 보이는 산과 바람 때문에 빠르게 지나가는 구름과 나무가 한 폭의 풍경화 같다. 20일 전의 나는 지금의 나를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걷고 나서는 잘 먹고 푹 쉬고 있으며, 짐을 줄이고 스틱까지 마련해서 부담을 줄인 몸은 걷기에 최적화되고 있다.
날마다 산티아고를 향해 나아가는 것만큼, 그게 무엇이든 그만큼 나아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고통일 수도 있고 그걸 극복하는 마음가짐일 수도 있다. 까미노에서는 종일 내 육체를 움직여 온 몸의 모든 기관을 느껴보는 경험을 지속하게 된다.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상처가 아무는 것도, 오늘처럼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것도 감사해야 할 일이다. 요즘 이런 말을 하면 듣고 있던 케이가 웃는다. “누나, 그러다가 한국 가서 종교에 귀의하겠어요.” 그것은 종교의 문제라기보다는 감사의 이야기이다.


엘간소(El Ganso)라는 마을로 들어온다. 해발 1000m가 가까워지는 지점이라 바람이 세다. 돌로 쌓은 담과 조심스레 꽃을 피운 나무, 빈 나뭇가지에 걸린 작은 구름이 그림 같다. 집도 몇 채 안보이는 마을인데도 바(Bar)가 두 개나 있는 걸 보니 성수기에는 이곳에서 쉬다가는 순례자가 많은 가보다.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풍경과 유사한 돌담과 나무문도 보인다. 이런 풍경을 네팔 안나푸르나 트레킹에서도 만났었다. 바람이 심한 산간마을의 돌담은 지역을 초월해서 비슷한 이유로 쌓아 올려져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마을에도 종탑이 있는 교회가 있고 종탑 위에는 새둥지가 있다. 그 풍경이 이제는 마음의 안식을 주는 자연스러운 배경이 되었다.


아까부터 나를 뒤쫓던 흰 고양이는 아마 사람이 그리운 것 같다. 비수기인 3월, 순례자가 하루에 몇 명이나 지나갈까? 나를 앞질러 간 순례자는 대여섯 명뿐이다. 계속 따라와서 마을을 벗어날 때까지 따라오면 어떻게 할까 고민까지 했지만 이 녀석, 보기보다 똑똑하다. 마을 경계에서는 멈춰서 제자리에 앉아 순례자를 배웅만 해준다. “안녕, 잠깐이나마 동행이 되어 준 엘간소의 야옹이!”


목적지인 다음 마을 라바날델까미노(Rabanal del Camino)까지 7km 정도가 남는다. 오랜만에 풍경을 즐기며 기분 좋게 걷다보니 벌써 도착 한 줄 알았던 케이가 앉아 있다. 어제 남은 맥주 한 캔을 배낭에 넣어 와서 마셨다며 따뜻한 햇살 아래 앉아 있다. 날마다 빠른 속도로 걷는 그지만 그냥 지나가기에는 이 풍경이 못내 아름다웠나보다. 어제부터 케이도 발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보면 발이나 다리, 무릎 어딘가가 아픈 건 이만큼 걸은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는 생각보다 내가 빨리 왔다면서 놀란다. 발이 아직 부어있어 크록스를 신고 흙길을 걸었더니 먼지가 뽀얗게 쌓였지만 오늘은 내가 생각해도 잘 걸어왔다. 케이를 만난 김에 나도 휴식시간이다. 


다음 길은 산을 오르는 자동차 도로를 끼고 까미노가 이어진다. 지나가는 자동차도 많지 않은 길에 순례자들만 걸어가는 중이다. 산길로 오르며 메세타의 평원이 끝났음을 몸으로 실감한다. 오늘 걸음의 마지막 고비다.
산을 오르는 길에 구름이 반긴다. 쌀쌀한 공기와 헉헉거리는 호흡이 묘하게 어울린다. 막바지 산길을 걸어 드디어 겨우 60명 정도가 산다는 작은 마을 라바날델까미노(Rabanal del Camino)초입이다. 오늘의 걸음을 다했다는 즐거움을 만끽하려는 찰나, 시간 약속이나 한 것처럼 승용차가 한 대가 달려와 내 앞에 선다. 차의 문이 열리더니 거기서 한 사람이 내린다. 놀랍게도 그녀는 하루까다. 우연히 만난 나를 보고 놀라기는 커녕,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고는 그 운전자와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더니 몇 번이고 그라시아스를 외치고 차를 돌려보낸다.


아침에 길을 잘못 들어선 하루까는 예상대로 헤매다가 사람들에게 물어서, 다시 까미노로 들어와 제대로 걸었다고 한다. 그녀의 핸드폰을 보니 내가 커피를 마신 바에서 똑같이 커피도 마셨고 엘간소에서 나를 따라왔던 흰 고양이도 만났다. 그러다 또다시 길을 잃어서 이번에는 히치하이킹을 했다는 것이다. 표지만 따라가면 되는 까미노에서 하루에 두 번이나 길을 잃기도 어렵지만 수완도 좋게 겁 없이 승용차 얻어 타고 배시시 웃으며 나타나는 털털한 그녀 때문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하루까는 걷는 과정 자체보다 산티아고까지의 완주를 열망하고 까미노에 온 것 같다. 슬슬 다리가 아프기 시작하는데 사흘째 걸음을 벌써 히치하이킹으로 메우는 하루까의 임기응변이 부럽기까지 하다.


우리보다 늦게 이 마을에 도착한 다른 순례자들은 모두 부엔까미노란 말을 남기고 다음 마을로 올라간다. 산 아래 작은 마을의 예쁜 알베르게에는 하루까, 케이, 나 이렇게 세 명만이 묵는다. 길은 거기 있지만 가는 것도 멈추는 것도 각자의 의지다.
72명이 한 번에 묵을 수 있는 도미토리에 달랑 세 개의 침대만 쓴다. 성수기 같으면 화장실이나 샤워실 이용 때문에 고생일 테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개인 욕실이나 다름없다.
소꿉놀이처럼 물건을 파는 진짜 소박한 띠엔다에서 달걀 몇 개와 호박, 피망, 양파, 쌀과 와인을 산다. 한국식 채소 볶음밥과 호박전을 만들 생각이다. 하루까는 가방에서 고형수프를 꺼내더니 물과 양파를 넣어 수프를 만든다. 가볍게 가지고 다니다가 물만 있으면 간단히 국물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걸 여태 모르다가 하루까 때문에 알게 되었다. 점심도 거른 배고픈 순례자들에겐 메뉴가 무엇이어도 진수성찬이다. 볶음밥에 계란 프라이까지 얹어 남김없이 다 먹는다. 걸으면서 스치던 수만 가지 생각들과 날마다 케이와 나누는 수백 가지 이야기들을 만들어 주느라 내 발은 일생일대의 고난을 극복하는 중이다.


저녁 무렵 알베르게 밖으로 나가 고요한 마을을 산책하며 구름이 드리운 하늘이 어두워지는 것을 바라본다. 태양이 사라진 산골마을에는 어둠이 재빠르게 번진다. 까만 밤, 알베르게 마당에서 바라본 해발 1150m의 하늘에는 별이 선명하게 반짝이고 하루까와 케이는 감탄사를 연발한다. 자이살메르 낙타 사파리에서 별들의 강을 보았고 마추픽추와 우유니 사막의 쏟아지는 별을 보고 왔지만, 오늘 밤 하루까와 케이와 함께 바라보는 라바날에서의 소박한 북두칠성도 그에 못지않게 아름답다. 별을 바라보며 마음의 일기를 써 본 날이 얼마나 있을까? 목이 아프도록 하늘을 올려다본다. 와인에 취한 건지 모두 아무 말이 없다.


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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