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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플앤스토리] “무대 인생 60년…외로웠던 그 길 이제서야 옳았음을”
-국립창극단 첫 프랑스 진출…14~17일 ‘변강쇠 점 찍고 옹녀’ 공연

-예술감독 그리고 배우 김성녀가 말하는 ‘60년, 내 인생의 무대’




[헤럴드경제=김아미 기자] “이 스카프 예뻐요? 아는 디자이너한테 비싸게 주고 산 거예요.”

김성녀(66)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이 검은색 시스루 이너에 녹색 플리츠 상의를 겹쳐 입고 메시 소재로 짠 검은색 스카프를 두른 채 벚꽃나무 앞에 섰다. “스카프 디자인이 독특하고 의상에 잘 어울린다”고 하자 “비싸게 주고 산 것”이라며 가격을 살짝 귀뜸해준다. 15만원. 유명한 배우가 보통 “비싸다”고 말하는 액세서리는 15만원이 아닌 150만원쯤 되는 가격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지난 5일, 김 감독을 국립극장에서 만났다. 극장 산하 국립창극단은 창극 사상 처음으로 프랑스 진출을 앞두고 있었다.

무대 인생 60년.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한지 올해로 4년째. 김성녀는 소탈했다. “이젠 배우가 아닌 국가 공무원이 된 것 아니냐”는 말에 “공무원 옷은 맞지 않는 것 같아 외부 활동을 할 수 있는 비상임직으로 감독을 맡고 있다”는 그는 공무원 옷은 물론, ‘명성’에 걸맞을 법한(?) 명품 옷 같은 것도 입지 않았다. 되레 “김성녀가 명품인데 왜 명품옷이 필요하냐는 말을 주위에서 듣는다”며 웃었다.

김성녀의 옷은 ‘배우’였다. 주말 전라남도 광주에서 음악극 ‘어머니의 노래’ 공연이 예정돼 있던 그는 “내가 남도에서 잘 먹히는 스타일이어서 그런지 목포, 여수에서도 계속 공연 콜이 들어온다”며 마치 데뷔를 앞둔 신인 배우처럼 달뜬 모습이었다. 


지난 5일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을 벚꽃이 만개한 국립극장 정원에서 만났다. “어머니가 선생님팬이에요”라고 하자 “난 꼭 그렇더라.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기가 팬이라고 하는 게 아니고 어머니 아버지가 팬이라고 한단 말야”라며 소녀처럼 웃었다.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어머니, 나의 프리마돈나=“어머니, 나의 영원한 프리마돈나. 만일 내게 연극배우의 끼와 재능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김성녀 자서전 ‘벽속의 요정’ 中>

배우 김성녀는 다섯살 때 처음 무대에 올랐다. 배우였던 어머니의 아역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1950~1960년대를 풍미한 ‘여성 국극’의 대모 박옥진(1935∼2004) 여사다. ‘여성 국극’은 춘향전, 심청전 같은 이야기들로 만든 음악극인데, 이몽룡, 심봉사 같은 배역도 모두 여자들이 연기한 것이 특징이었다.

여성 국극 대모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김 감독은 과거 ‘마당놀이’ 시절 남장을 하고 이몽룡 같은 역할을 자주 맡았다. “남장을 했을 때 관객들이 더 좋아했다”는 그의 말처럼, 갓 쓰고 도포 입은 여배우의 모습에 팬들은 더욱 열광했다.

오늘날 배우 김성녀가 있기까지 두 명의 여인이 있었다. 첫번째 여인이 바로 어머니다.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아버지 김향(1921∼1999)은 함경도 이북에 본처를 뒀지만 전쟁통에 남하해 박옥진 여사를 만났다. 그리고 진도에서 목포로 가는 피난 뱃길에서 태어난 것이 김성녀다.

그는 “극장이 집이었고 놀이터였으며 배우들의 의상을 담아놓은 바구니가 내 요람이었다”고 회상했다. 배우인 어머니와 연출가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극장에서 자란 그는 천상 배우의 운명을 타고난 셈이었다.

두 번째 여인이 가야금 병창 인간문화재 고(故) 박귀희(1921~1993) 선생이다. 가장 역할을 해 왔던 어머니가 무대에서 쓰러진 이후 당시 고등학생이던 김성녀는 가족의 생계를 도맡아야 했다. 생계를 위해 동생과 함께 ‘비둘기 시스터즈’를 결성하고 가수의 길로 나섰지만 2년만에 접었다.

어느날 문득, 김성녀는 달빛 아래 대청마루에 앉아 가야금 소리를 들은 이후 가야금을 치면서 노래를 불러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그래서 만난 것이 박귀희 선생이다. 김성녀는 박귀희 밑에서 가야금과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가난했지만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줬던” 시간들이었다.

이후 김성녀는 당시 김소희 명창에게 소리를 배우고 있던 김동애로부터 제안을 받는다. 극단 ‘민예’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 1976년, 김성녀는 음악극 ‘한네의 승천’에서 주인공 한네 역을 맡으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시기 평생의 반려자가 된, 연출가 손진책을 만났다.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제23호)인 박귀희로부터 가야금 병창곡을 사사한 제자가 안숙선과 김성녀다. 안숙선은 명창의 길을 걸었지만, 김성녀는 연극을 접하면서 다른 길을 걸었다.

“명창의 길로 갔다면요? 안숙선 선생과 선의의 경쟁자가 돼 있었겠죠.”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여전히 내 인생의 무대는 ‘무대’=“박귀희 선생은 국악만 하라고 하셨어요. 연극은 생명이 짧지만 국악은 나이 칠팔십 먹어도 대접받으면서 할 수 있다고요. 그런데 장민호(연극배우ㆍ1924~2012) 선생 말씀은 달랐죠. 성녀는 이제 예술을 해야한다고 하셨어요. 춤추고 노래하는 마당놀이 하지 말고 연극을 해야한다면서요.”

‘선생들’이 탐내던 김성녀는 어느 한 길만을 가지 않았다. 1978년부터 국립창극단 단원, 국립극단 단원 생활을 거치며 소리도 하고 연기도 하는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1년부터 2010년까지 30년의 세월동안 ‘마당놀이’를 통해 대중과 호흡하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김성녀를 배우로 키운 건 두 여인이었지만, 그가 계속 배우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건 남편인 연출가 손진책의 든든한 지원이 컸다. 손진책은 그 누구보다도 아내인 김성녀가 “타고난 배우”였음을 꿰뚫어봤다.

“남편은 제가 손수건을 빨아주거나 밥을 차려주는 일을 해주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포기했어요. 김성녀가 집에서 설거지하는 건 국가적 손실이라고 했죠. 손진책 연출은 저를 타고난 배우라고 생각했거든요. 다들 부러워 하더군요. 대사를 외고 연기를 할 때는 저를 쪼기도 했지만, 살림 못한다고 쪼는 법은 없었어요.”

김성녀는 과외로 영화, 드라마에도 출연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임권택 감독의 ‘춘향전’이다. ‘월매’ 역할로 그 해 춘사영화제 여우조연상을 손에 쥐었다.

무대에서 승승장구 해 온 것 같은 그지만 “가난한 연극쟁이로 살면서 이제서야 겨우 밥 먹고 살 정도가 됐다”고 말했다. 고생 한 번 안 해봤을 것 같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는 그는 “삶은 투쟁이었다”고 회상했다.

“결혼하고 줄곧 아이들 돌반지 하나 안 남아 있을 정도로 어려운 생활이었어요. 이름은 알렸지만 여전히 가난한 배우였죠. 아르바이트로 드라마 ‘전원일기’에 출연하던 때가 있었어요. 어느날 배우들 많은 분장실에서 지갑을 떨어 뜨렸는데, 안에 있던 동전과 버스 토큰이 우루루 쏟아져 나온거예요. 떨어진 버스 토큰을 본 다른 배우가 그랬어요. ‘구멍뚫린 동전도 있네’라고요. 별 것 아니었는데 그렇게 내 자신이 초라할 수가 없었어요. 설움이 몰려왔죠. 그리고 생각했어요.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다. 가난하게 살지 않겠다. 지금도 내 자신이 안이해질 때면 그 때 생각을 해요.”

김성녀 감독이 프랑스 파리 ‘테아트르 드 라 빌’ 공연을 앞두고 고선웅 연출과 함께 막바지 연습이 한창인 국립창극단 배우들을 뒷 편에서 바라보고 있다.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창극단 변신, 아직 목마르다=김성녀는 무대는 물론 강단에도 섰다. 중앙대학교에서 재직하며 ‘음악극과’를 신설했고 ‘한국적 음악극’에 앞장섰다. 우리 소리와 함께 춤, 연기를 다 할 수 있도록 제자들을 가르쳤고, 그 제자들이 오늘날 새로운 창극, 새로운 마당놀이의 주역 자리를 채우고 있다.

학교 퇴직 이후에는 무대에 설 기회가 더 많아졌다. 흘러간 옛 노래들을 엮어 만든 음악극 ‘어머니의 노래’는 실제 박옥진 여사의 이야기를 녹여낸 작품으로, 지난 8일 광주 공연에서 매진을 기록했다. 지난해에는 뮤지컬 모노드라마 ‘벽속의 요정’ 지방 공연도 성황리에 마쳤다. 올해에는 이해랑 탄생 100주년을 맞아 신시컴퍼니와 국립극장이 공동 제작하는 연극 ‘햄릿’ 무대에 설 예정이다. 지난 2010년 ’제20회 이해랑 연극상‘을 받은 김성녀가 역대 수상자들과 함께 만드는 무대다.

김성녀에게 주어진 또 다른 무대는 창극단이다. 현재 창극단은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이른바 ‘창극 르네상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술감독 부임 이후 정체돼 있던 창극단이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관객이 젊어졌고 많아졌다. 그는 “이제 단원들도 표를 사야할 정도”라고 말했다. 평론가들도 창극 비평을 하기 시작했다. ‘전통의 현대화’라는 과제를 놓고 안호상 국립극장장과 한 호흡으로 시너지를 낸 결과물이다.

국립극장 내 창극단 예술감독실 한 쪽 벽면에는 김 감독이 창극단에 부임한 이후 무대에 올렸던 공연 포스터들이 빼곡히 붙어 있다. 고전을 현대적으로 연출하고 재해석한 작품들이다. 포스터 위에는 ‘매진사례’라고 써 있는 노란 봉투들이 함께 붙어 있다. 부임 후 첫 장편인 스릴러창극 ‘장화홍련’부터 시작해 줄줄이 히트작을 내 놨다.

“옛날 창극을 그리워하는 분들은 제가 창극을 망쳤다고 비판도 많이 하십니다. 그러나 시대가 새로운 걸 원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변신은 아직 목마르죠. 창극의 원형, 정통성과 독창성을 찾으러 가는 여정은 긴 호흡으로 가야하는 거고요. 무엇보다도 관객이 찾는 공연을 만들고 싶습니다.”

감독 부임 후 대표 성공작인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14일부터 17일까지 프랑스 파리 중심부에 위치한 극장 ‘테아트르 드 라 빌’ 무대에 선다. 현대연극 및 현대무용의 중심지로 꼽히는 프랑스 대표 공연장으로부터 먼저 초청 공연 요청을 받았다.

고전 ‘변강쇠전’을 재해석한 ‘변강쇠 점 찍고 옹녀’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고선웅이 쓰고 연출한 작품이다. ‘18세 미만 관람불가’임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공연 당시 평균 객석 점유율 90%를 기록할 정도로 높은 인기를 얻었다. 공연을 앞둔 김 감독은 “즉흥적이고 해학적이고 역동적인 한국 고유의 문화적 정서가 잘 전달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바랐다.

‘골동품’처럼 모셔졌던 우리의 고전들을 한국 관객은 물론 세계 관객에게 알리려는 예술감독, 그리고 배우 김성녀의 무대 60년은 어땠을까.

“외롭고 대접 못 받는 길을 걸어 왔어요. 하지만 그 길이 옳았다는 확신이 이제서야 듭니다.”



☞김성녀 감독은…

▷학력=진명 여자고등학교 졸업(1968), 단국대학교 국악학과 학사졸업(1990), 중앙대학교 음악대학원 음악학 석사 졸업(1995)

▷경력=국립창극단 단원(1978~1980), 국립극단 단원(1981~1984), 성균관대학교 사회교육원 공연예술과 주임교수(1996~1999), 중앙대 한국음악과 겸임교수(1999~2000), 중앙대 국악대 음악극과 학과장(2000~2005), 중앙대 국악대학 학장(2006~2010), 중앙대 국악교육대학원 대학원장(2006~2010), 문화융성위원(2013~2015), 국립창극단 예술감독(2012~현재)

▷상훈=백상예술대상 연기상(1986ㆍ1991), 백상예술대상 인기상(1990), 서울연극제 여자연기상(1991, 1992),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주연상(1996년), 춘사영화제 여우조연상(2000), 김동훈 연극상, 올해의 배우상(2004), 동아연극상, 올해의 예술상, 비평가상(2006), 한국연극협회 ‘자랑스러운 연극인상’ 수상(2007)


ami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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