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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109. 마드리드서 삼겹살 파티…또 다른 인연의 시작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언젠가 하이난에 가면 만나리라 약속 아닌 약속을 하고 메이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호스텔을 나선다. 도착하던 날부터 연일 흩뿌리던 빗방울은 사라지고 떠날 때가 되니까 태양이 얼굴을 내민다. 거리에 쏟아진 햇살은 눈부시리만치 밝다. 포르투에 머무른다면 도루 강변의 바에서 한없이 와인이나 마시면 좋을 테지만 오늘은 포르투와 작별의 날이다.
마드리드와 코임브라로 떠나는 버스터미널이 전혀 다른 방향이라 케이와는 호스텔을 나오자마자 헤어진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알베르게에서 우연히 만나 40일을 함께 했던 케이와 나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 그 멋진 여정을 떠올리면 늘 함께 생각날 사람... 뭐라고 이별의 인사를 해야 하나 우물쭈물하는 사이, 케이가 선수를 친다. “잘 가요, 누나. 한국에서 봅시다!” 케이는 건조한 작별인사를 던지고 악수를 청하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간다. “한국에서 보자. 잘 가.” 나는 마치 선제공격을 당한 사람처럼 어정쩡하게 인사말을 하고 얼떨결에 악수를 나누고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참 명료한 이별이다.


케이는 코임브라로 가서 잠시 그곳에서 공부하는 하루까를 만난 후 내일부터 까미노 포르투게스를 시작한다. 산티아고로의 또 다른 걸음을 시작하는 그의 머릿속과 까미노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여행 속으로 떠나는 나의 마음은 사뭇 다를 것이다. 케이의 이별법이 마음에 든다. 헤어짐 앞에서 기우뚱하던 감정이 제자리를 되찾는다.
오랜만에 배낭을 메고 걸으니 힘이 든다. 가까운 메트로 역으로 가서 카사 다 무지카 역까지 전철을 타기로 한다. 아침 출근시간의 분주함 속에서도 포르투 사람들은 친절하다. 스페인과는 달리 영어도 잘 통하기도 하지만 출근시간의 남자가 이방인이 역의 위치를 확실히 인지하는지 확인한 후 잘 가라는 인사까지 덧붙여주는 데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보증금은 돌려받을 수 없었지만 안단테(Andante)라는 포르투갈 지하철 티켓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사용해서 터미널에 도착한다.
마드리드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 건 오전 10시다. 어떤 사람들이 국경을 넘는 버스에 오를까 궁금했는데 커다란 캐리어를 두 개나 든 아주머니가 짐을 싣고 있다. 겨우 예닐곱 명 정도의 사람을 태운 채 버스가 출발한다. 국경을 넘는 긴 버스여행, 게다가 아주 오랜만에 혼자가 되었다.


차 창 밖의 하늘은 유난히 맑고 흰 구름이 그림처럼 피어오른다. 버스는 포르투갈의 풍경을 금방 벗어나 스페인으로 들어간다. 특별히 이미그레이션이 없는 국경에선 경찰이 잠깐 버스에 올라 여권을 쳐다보고는 그냥 내린다. 스페인의 비고(Vigo)에서 포르투갈의 포르투(Porto)로 국경을 넘을 때는 이런 절차마저도 없었다. 유럽에는 나라 사이의 경계를 의심 없이 드나들 수 있는 평화가 자리하고 있다. 같은 민족끼리, 알아듣는 언어를 쓰면서 서로 총구를 들이대는 나라의 국민이어서인지 국경을 지날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곤 한다.
버스는 각 도시의 터미널들을 거쳐 승객을 내리고 태운다. 어느 도시에서는 산티아고로 가는 까미노의 이정표와 노란 화살표를 만나기도 한다. 까미노가 끝나고 포르투에 4박 5일을 머물렀어도 그 기억들은 더욱 빛깔을 더한다. 달리는 버스 바깥의 풍경이 시시각각 변하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길 위에서의 추억이 상영되고 있다.
오전 10시 15분 포르투를 출발한 버스는 오후 8시 45분 마드리드에 도착한다. 9시간 반의 버스여행이 끝난다. 예약해 놓은 마드리드의 알베르게로 돌아가려면 메트로를 타야 한다. 40일 전에 사서 쓰다가 간직한 10회권 티켓을 꺼내 순환선 6호선을 타고 9호선에 환승해서 알베르게를 찾아간다. 이번 여행에서 벌써 세 번째 들어오는 마드리드는 이미 낯설지 않다.
알베르게에 들어가니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다. 전에 왔을 때 투숙객이 두 명 밖에 없던 기억이 있어서 별 기대 없이 벨을 누른다. 그런데 오늘은 알베르게에 사람이 많다. 그중에는 심지어 아는 얼굴이 반기고 있다. 레온에서 만난 과학자 주가 환히 웃으며 악수를 청하는 것이다. 미국의 회사에서 비자 처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바르셀로나에서 아웃하지 못하고 대사관이 있는 마드리드로 와서 일처리를 하는 중이라고 한다.


막 순례를 마친 사람들 여럿이 식사를 하는 중에 내가 도착한 것이다. 나보다 일주일 정도 늦게 시작한 사람들이 막 걸음을 끝내고 마드리드의 한국인 알베르게에 모여 있다. 흔쾌히 테이블에 자리를 만들어 수저를 놓아주는 한국식의 호의가 반갑다.
주를 빼고는 모두 처음 만나는 사람들인데도 다들 어색하지 않다. 까미노의 대장정을 산티아고까지 걸어낸 순례자이면서 한국인이라는 동지의식이 낯선 사람들을 전혀 낯설지 않게 한다. 오가던 외국인 순례자들도 공통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한국에 돌아온 듯 시끌벅적한 한국어가 즐겁고 까미노에 다시 선 듯 유쾌한 대화들이 이어진다.
직업도, 나이도, 사는 곳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지만, 한국인이고 순례길을 걸었다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밤이 깊어간다. 출발한 첫날 부주의로 배낭을 잃어버리고도 까미노를 완주한 두 형제의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다.
혼자 버스를 타고 온종일 국경을 넘어왔는데, 순례를 마친 공통 관심사 충만한 한국 사람에 둘러싸이는 행운을 만난다. 게다가 김치를 놓고 삼겹살을 굽는 테이블에 숟가락 하나를 더 얹어 저녁식사까지 해결하다니, 고독한 하루 끝의 예기치 못한 반전이다.
오랜만에 침대 두 개짜리 방을 혼자 쓴다. 헤어지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일도 쿨한 여행자가 되기까지, 참 많은 시간을 길 위에서 보냈다. 이제는 진짜 여행 모드로 돌아가야 하는데 아직도 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그 여정의 벅참이 드리워 있다.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나 목적지에 닿고 떠나는 일들이 일상보다 농도 짙고 신속하게 전개되는 여행 속에서 인생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배낭을 열어 꺼내놓은 짐들이 침대를 어지럽힌 채, 길 위에서의 백 아홉 번째 밤이 깊어간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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