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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즘] 어떤 증거를 버리고 살릴 것인가
‘자유심증주의’. 피고인의 범죄사실을 규명할 때 어떤 증거를 더 신뢰할지, 어떤 증거는 무시할지에 대한 판단을 모두 법관에게 일임한다는 원칙이다. 재판은 언제나 엇갈린 증언과 증거가 부딪힌다. 검사는 피고인의 범죄 사실을 명확히 드러내려하며, 변호인은 피고인에 조금이라도 유리한 증거를 제시하려 한다. 여러 가지 증언과 증거가 충돌할 때 무엇을 더 신뢰할 것인가, 어떤 걸 더 증명력이 있는 것으로 봐야할까. 이럴 때 등장하는 게 바로 자유심증주의다. 법원 판결문에 거의 매번 등장하는 용어다. 법관의 힘은 여기서 나온다. 나에게 유리하거나 반대로 불리한 증거를 채택할 수 있는 권리, 심지어 나의 죄를 사할 힘까지 법관이 가지고 있다.

‘바짓가랑이 걷어보라고 말하지 않은 죄’. 역사학자 한홍구는 최근 출간한 <사법부: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에서 법관들이 고문을 호소하는 피해자들에게 고문 흔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면 죄가 아니겠느냐고 묻는다. 현대사에서 ‘법과 양심’에 따르기보다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권력의 압력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법관들이 훨씬 더 많았다는 주장이다. 영화 ‘변호인’을 떠올려 보자. 사회과학서적을 돌려 읽으며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대학생이 끌려갔다. 재판부는 군사정권에 의해 제시된 북한의 지령에 따라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빨갱이’라는 주장을 더 증명력 있는 증거로 채택한다. 변호인은 빨갱이라는 증거로 채택된 그 사회과학 서적이 영국이나 미국 등에서 대학생이면 누구나 읽는 교양서적이라는 점을 내세우지만 법원은 확인하지 않는다. 바짓가랑이만 살짝 걷어보면 확인 가능한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한다.

‘사정정국’. 그릇된 것을 조사해 바로잡는 시기라는 뜻이다. 롯데그룹 및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대대적인 기업 비리 수사, 정운호 게이트로 발전된 법조비리 수사, 국민의당에 대한 불법정치자금 수사 등이 본격화하면서 요즘 상황을 이렇게 판단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통 사정정국은 정권 말기 정적을 제거하고, 느슨한 공무원 조직과 경제계에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해 기획된다고 한다. 지금이 진짜 사정정국인지는 이견이 많지만 검찰이 박근혜 정부 들어 가장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검찰은 지금 산더미처럼 쌓인 자료를 분석하느라 밤낮이 따로 없다. 롯데그룹에서 압수한 컴퓨터 하드디스크 및 문서 등이 1톤 트럭 8대 분량이다. 수많은 자료 중 무엇을 증거로 채택할지, 어떤 범죄로 기소할지는 검찰의 몫이다. ‘기소독점주의’를 적용하고 있는 우리나라 사법체계에선 그렇다. 어떤 증거를 살리고 어떤 증거를 죽일 것인가.

법조계 신뢰가 땅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지금처럼 무수한 수사가 진행되고 매일 수많은 재판이 진행될 때야 말로 신뢰를 회복할 최고의 시기가 아닐까 싶다. 어떤 증거를 고르고 버리는지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는 점을 꼭 기억했으면 한다. 검사는 공소장으로 말하고, 판사는 판결문으로 증명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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