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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기고 -조현용 경희대 국제교육원장] 한국사람은 정말 정이 많을까
한민족은 흔히 ‘정(情)이 많은 민족’이라고 이야기한다. 한국인의 주요 특징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게 정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만 정이 많은 것은 아닐 듯하다. 대학원 박사과정인 제자 중 미얀마, 베트남, 태국 등지에서 온 학생들이 있는데, 그 나라 사람들도 정이 대단하다고 한다.

하긴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나라일수록 정이 깊을 수 있다. 아직 농사가 중요하고 사람이 중요한 나라라면 오히려 한국보다 정이 더 깊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사실 요즘의 우리 모습은 정과 관련이 멀어 보인다. 이웃 간의 정. 이런 말은 도시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정이 생기겠는가. 정은 경제 발전, 산업화, 도시화 등과 연관성이 깊다고도 할 수 있겠다.

경제발전은 정을 옅게 만든다. 그럼에도 한민족에게 정이 많다고 이야기하려면 한민족의 정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우리말에는 정과 관련된 표현이 많다. ‘정을 통하다’, ‘정을 쏟다’, ‘정을 나누다’, ‘정을 주다’, ‘정을 붙이다’, ‘정을 떼다’, ‘정이 들다’ 등이다. 정분이라는 말도 있는데 정분은 정을 나누는(分) 것이라는 의미다.

우리말 중에서 특히 재미있는 표현이 ‘미운 정 고운 정’이다. 생각해 보면 순서가 특이하다. 왜 ‘미운 정’이 앞에 있을까. 앞에 있다는 건 그게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고운 정’은 누구나 있다. 하지만 ‘미운 정’은 만들기가 어렵다. 이 말은 밉더라도 정을 주어야 한다는 태도를 보여 준다.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을 갖는 것이 삶의 지혜라는 생각이 드러난다.

‘정을 붙이고 살다보면 어디나 고향이 된다’는 말이 있다. 당장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어차피 그곳에 살아야 한다면 정을 붙여야 한다. 그래야 정이 생긴다는 의미다.

정에는 좋은 것만 있는 게 아니다. 나쁜 것도 포함된다. 삶 속에는 기쁨만 있는 게 아니다. 슬픔도 억울함도 분노도 있을 수 있다.

필자가 생각할 때 ‘미운 정’이야말로 우리 정의 핵심이다. 한국인이 정이 많다면 그건 아마도 ‘미운 정’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미우면 정이 안 생길 것처럼 말하지만 미워도 정이 생긴다. 밉다고 헤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밉다고 안 만나면 같이 살 사람이 없다. ‘미운 정’이 삶의 지혜라는 건 이런 맥락에서다.

그래서 우리는 ‘미우나 고우나’라는 말도 한다. ‘미우나 고우나’ 남편이고, 아내고, 가족이고, 이웃이다. 여기에도 밉다가 앞에 있다. 우리말에서 ‘울고 웃고’, ‘진 자리 마른 자리’처럼 부정적인 것이 앞에 나오는 경향은 다 같은 사고방식으로 여겨진다. 어려움을 이겨내면 그 다음부터는 편안함이 남는다는 것이다.

한민족의 정은 미워도 고와도 같이 사는 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운 놈에게도 떡 하나를 더 준다’는 표현을 한다. 정은 같이 살아가기 위한 지혜로운 감정이다. 그게 정이다.

조현용

경희대 국제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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