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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프칼럼] ‘재벌의 딸’과 식사를
여름방학을 맞아, 외국유학 중인 후배 S가 귀국했다. 선후배 몇 사람이 식사나 하자며 모였는데, 반가워하며 던진 S의 인사말이 이랬다.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버터가 발린 서양식 인사말이나 신세대의 표현은 아니더라도, 까마득하게 어린 후배의 입에서 나온 예스럽고 중후한 인사말에 다들 폭소를 터뜨렸다. 한국에 온 소감을 물었더니, S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재벌의 딸 같은 생활을 하고 있어요.”

크고 깨끗한 부모님의 아파트에 머물고 있다는 그녀는 한국에서 주차할 때 주차카드도 없이 자동인식기로 드나들고, 큰 호텔이 아니라 작은 음식점에서도 발레 파킹을 누린다고 했다. 버스나 전철을 몇 번씩 갈아탈 때도 카드 하나면 되고, 정류장마다 기다리는 차의 정보가 실시간으로 뜨니 몇 년 만에 돌아와도 전혀 헤매지 않고 돌아다닌다고 했다. 집에서 전화만 하면 치맥은 물론 차가운 빙수까지 배달을 해주고, 집을 나서면 도처에 먹을거리가 깔려 있다고 놀라워했다. TV에는 수백 개의 채널이 가동되고, 리클 라이너 소파에 누워 TV를 보다가, ‘비데’라는 휴지도 필요없는 화장실에서 뒤처리를 한다고 아주 좋아했다.

“이곳에서 사는 것이 끔찍해요.”

그런데 S는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이 이런 표현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더 큰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고 축하를 받다가도, 아이를 조기유학 보내놓고 자랑을 길게 하다가도, 두 개의 냉장고를 두고 세 번째 냉장고의 공간을 고민하다가도, 이 나라의 정치와 교육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혹은 전세 값과 교육비가 얼마나 비싼지를 하소연을 하거나, 결국 살기가 힘들다고 대부분 절망감을 호소했다는 것이다. 돈이 없다고 불평하고, 그러다가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 이야기를 계속한다는 것이다.

S는 아쉽게도 이틀 후에 ‘재벌의 딸’에서 서민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 나라에서 간당간당한 돈으로 월세를 내고, 에어컨이 없는 더운 실내의 딱딱한 의자에 앉아 힘들게 공부하고, 뻑뻑한 출입문을 힘주어 열고 닫고, 싸게 산 재료로 매 끼니 손수 음식을 하고, 한국보다 비싼 의료보험과 일상을 감당하기 위해 동전까지 세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마음이 평안한 삶이라고 했다. 외국에서 한국어감이 떨어져 나온 인사표현이라 여겼는데, S는 진심으로 우리의 평안을 다시 물었다. 일평생 수백 번 병원을 찾으면서도 정신적인 문제를 위해서는 단 한 번도 병원을 찾지 않는 사람처럼, 우리는 갑작스럽게 정신의 평안을 들여다보는 것에 익숙지 않아서 쉽게 답하지 못했다.

식당을 나오면서, S는 팁을 주지 않아도 되니 동전이 굳었다고 좋아했다. 이것만 봐도 참으로 살기 좋은 나라라고 해맑게 되풀이했다. 헤어질 때는 그녀가 서로 껴안는 서양식의 진한 인사를 거침없이 해왔다. 그런데 돌아오면서, S의 말이 귓가를 자꾸 건드렸다. “모든 지켜야할 것들 중에 마음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어요. 다른 물질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훨씬 부유하게 사는 방법 같아요.” 한국의 일상을 재벌의 삶에 비유한 그녀의 유학생활이 가난하거나 불행하지 않은 이유이지 싶었다. ‘재벌의 딸’과 식사한 후유증이 한동안은 있을 듯하다.

김다은

소설가·추계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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