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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126. 페스의 메디나, 천년을 이어온 그들만의 미로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페스(Fes)는 1200년에 건설된 도시로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슬람 문화가 만들어 낸 독특한 중세 도시의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된 도시이라고 한다. 본래 아랍어로 도시를 뜻하는 “메디나(Medina)”는 지금은 이슬람 도시의 구시가를 의미한다. 페스의 메디나는 어느 책엔 팔천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만 개라고도 하는 수많은 좁은 골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옛 모로코 사람들이 살던 건물과 골목에서 그 후손들이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곳, 그래서 페스의 메디나는 중세와 현대가 공존하는 곳이다.


하늘은 나무랄 데 없이 맑다. 메디나 초입의 거리에는 자동차와 사람들이 분주하다. 모로코 여행자라면 반드시 들르는 곳이 페스의 메디나이니 관광객들이 많다. 물론 모로코인들이 지금도 거주하는 도시이기 때문에 여행자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은 더욱 많다. 화석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중세의 도시에 입성한다. 단단한 성벽의 문이 보인다. 자동차들은 멈추어 서서 관광객들을 내려놓는다. 메디나 안쪽으로 차는 들어가지 못한다.
호스텔에서 멀지 않은 문으로 들어갔을 뿐인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었다는 카라윈 모스크(Mosquee Qaraouiyne)의 초록빛 지붕이 선명하게 나를 반긴다.
페스 메디나의 미로 같은 골목 때문에 이곳에 들어서기가 두려웠다. 시작도 끝도 없이 사방팔방으로 이어지는 골목은 거미줄 같다고 표현할 수도 없다. 일정한 규칙을 발견할 수가 없는 골목들이다. 메디나의 비좁은 골목, 높은 벽은 뜨거운 사막의 햇빛을 막아준다. 낯선 침입자가 헤매도록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메디나는 사막의 모로코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삶의 터전”이다. 이방인 들어오면 길을 잃도록 설계된 것이니 페스의 메디나에서는 길을 잃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길을 잃을까 봐 어젯밤에 그렇게 걱정을 해댔으니 이런 미련함이 또 있을까?


처음 들어간 곳은 세파리네 (Seffarine : 놋쇠를 가공하는 사람) 광장이다. 말이 광장이지 대장간이 있는 작은 마당이다. 전통 방식 그대로 쇠를 달구어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대고 본격적으로 골목에 진입하기 직전의 이곳 작은 마당에 냄비를 비롯한 금속 제품이 쌓여있다.
드디어 다시 나올 수 있을지 모르는 미로로 진입한다. 좁은 골목에는 사람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당나귀가 짐을 나른다. 골목 안의 작은 가게들은 오전인데도 이미 흥정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거울과 등, 옷감이나 스카프를 팔기도 하고, 바부슈라 불리는 슬리퍼 모양의 전통 신발, 각종 향신료나 가죽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수크를 메우고 있다. 호박엿 비슷한 단 것을 팔거나 각종 수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 사이에는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볼 것이 너무 많아서 길을 잃어버리든 말든 정신없이 골목을 누비고 다닌다. 


여행자들이 단체로 모여 있는 곳에 슬며시 다가가 보면 거기가 바로 관광명소다. 수크에서 파는 물건들에 정신 팔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다니다가 이렇게 만난 것이 바로 카라윈 모스크(Mosquee Qaraouiyne)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라는 카라윈 모스크는 페스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 중의 하나다.
페스는 천년의 세월을 이어오는 메디나의 미로 같은 골목과 옛 방식 그대로 가죽을 만드는 태너리(Tannerie)로 유명하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골목이라 사람들에게 물어서 테너리를 찾아간다.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는데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는 슈아라 테너리(Tannerie Chouara)로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태너리는 가죽을 씻고 염색하는 작업장이다. 노란 가죽은 옆에서 따로 건조되고 흰 색과 다른 색들은 분리되어 염색되고 있다. 걸리버 여행기라도 읽는 듯, 거인의 팔레트에 소인들이 일하는 장면 같다. 전통방법 그대로 자연적인 재료로 염색되는 게 신기하고 대단하지만, 이 높은 곳에서도 악취가 나는데 실제로 작업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싶기도 하다. 이 풍경은 인도 뭄바이(Mumbai)의 도비가트(Dhobi Ghat) 풍경과 흡사하다. 그곳은 빨래만 하는 곳이지만 가죽을 염색하는 이곳이 훨씬 힘들 것이다. 이 악취를 어쩔 것인가?
모로코의 가죽은 품질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모로코가죽이 수출되어 유수의 유명 기업의 디자인을 거쳐 비싼 가죽제품으로 탄생한다. 내가 들어온 곳은 가죽 가방이나 가죽의류가 대량으로 전시되어 있다. 


손님을 기다리는 상인들과 온갖 물건들과 시장에 나온 사람들 사이를 부지런하게 걷는다. 모스크와 태너리에서 멀어질수록 경사가 높아지고 전문적인 수크나 관광객을 위한 물건보다는 현지인들을 위한 생필품을 파는 시장이 가까워진다. 시장에서는 오렌지와 야채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판다. 닭장 밖에 매어놓은 닭이 꼬꼬댁 울기도 하고 정육점의 진열대에는 살아있는 것 같은 표정의 양머리들이 나란히 누워있기도 하다.
메디나의 좁은 골목길에서 이 모든 것들은 당나귀나 말이 운반한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동물들을 자꾸 돌아보게 된다. 여자들의 필수품인 스카프를 파는 가게의 마네킨의 머리들이 무심히 지나가는 여행자를 깜짝 놀라게도 하지만 알록달록 예쁜 스카프를 싸맨 얼굴들에 웃음이 나기도 한다. 이슬람 국가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은 많을 것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다. 스카프에 감춰진 머릿결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시장이 끝나는 꼭대기에는 구제 옷들이 쌓여 있다. 한눈으로 보기에도 수크 안에서 본 고급 여성복과는 다르게 조잡한 옷들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입을 만한 옷은 하나도 없고 둘러보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대체 이 많은 옷들을 팔 수는 있을까?
지도를 보고 앱(App)을 활용하고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물으면서 다녀도 계속 길을 잃는다. 그러면 다시 지도를 보고 앱을 뒤지고 또다시 사람들을 붙잡고 길을 묻는다. 그렇게 찾아다니다 보면 길이 보인다. 길을 잃는 두려움보다 어떻게든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그렇게 다니다 메디나의 성문 중에서도 아름다운 장식으로 유명한 부 즐루드 문(Bob Bou Jeloud)을 찾았다. 아라베스크 무늬로 장식된 정교한 녹색 타일이 아름답다. 메디나 바깥쪽에서 바라본 부 줄르드 문은 페스를 상징하는 청색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골목에 맞닥뜨리면 덜컹 겁이 난다. 가다 보면 막다른 골목을 만나기도 하고, 오래된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 골목 사이에 나무를 덧댄 것을 모르고 공사 중인가 보다 하고 지나가기도 하다가 한참 후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된다. 그러다 마주한 골목에서 튀어나온 두 아이들은 나를 웃게 해준다. 장난을 치면서 나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귀여워서 사진을 찍으며 함께 웃는다. 관광객을 많이 봤기 때문인지 아이들은 사진에 거부감이 없다.
낡은 골목 모퉁이에는 고양이가 사뿐한 발걸음으로 걸어 다닌다. 기념품을 파는 작은 수레 아래에는 어미 고양이가 새끼들을 돌본다. 그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져서 그 앞에 한참을 쪼그려 앉는다. 사람 사는 세상의 온기가 좋다. 미로 속에서 만난 아이들, 고양이들이 겁에 질린 여행자를 무장해제시킨다. 여기도 사람 사는 세상이다.


우아하고 섬세한 건물을 시장 한가운데에서 만난다. 가이드를 앞세운 단체 관광객들이 줄을 서 있다. 마드라사 아타린(Medresa Attarine)이라는 곳이다. 이슬람의 모스크는 이슬람 학교인 마드라사(Medresa) 역할을 겸한다. 마드라사 아타린은 카라윈 모스크의 별관으로 설계되어 인근의 전문 향신료 시장인 수크 아타린(Souk Attarine)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타일로 섬세하게 조각된 벽과 대리석 기둥이 멋지다. 관람객도 몇 없어서 수크의 혼란함에서 잠시 벗어나 고요한 시간 속에 머물 수 있다. 중앙의 안뜰의 타일 조각과 삼나무로 장식된 패턴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안뜰에서 올려보는 파란 하늘이 이 순간만은 마치 내 소유인 것 같다. 메디나의 골목을 헤매면서 온종일 긴장한 마음을 잠시 위로받는다.


오르막길을 걸어 야채와 고기를 파는 시장을 지나 메디나의 성벽을 빠져나오면 미로는 끝난다. 자동차가 다니는 큰 도로를 따라 페스 엘 발리(Fes el Bali : 페스 구시가)가 아닌 다른 페스의 풍경이 펼쳐진다.
19세기 말에 지어진 고관 저택이었던 소피텔 팔레 자마이(Sofitel Palais Jamai)라는 이름의 멋진 호텔이 바로 옆이다. 무어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이 실제 호텔로 이용된다는 호기심에 호텔 입구의 성문으로 들어간다. 페스에 어울리지 않는 웬 검은 승용차들 수십 대가 줄지어 들어가고 슈트 차림의 남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오늘 아프리카 어느 나라의 귀빈이 이곳을 방문했다고 한다. 귀빈 행사에 나 같은 일반인이 기웃거려도 특별히 제지하는 사람도 없다.


이곳은 메디나의 서북쪽, 중세의 술탄들이 묻힌 메린 왕조 묘지(Tombeaux des Merinides)와 공동묘지가 보인다. 이곳에서 메디나의 전망을 볼 수 있다는데 날이 저무는 중이라 갈까 말까 망설이게 된다. 여기저기 다녀도 미로 같은 메디나의 골목이 익숙해지지는 않아서 긴장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멀리서 나를 바라보던 한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건다. 묘지를 관리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원하면 메디나의 전망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한다. 잠시 고민 끝에 이 사람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내가 헤매던 메디나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남자의 설명을 들으며 묘지를 따라 올라간다. 저 너머에 페스의 메디나가 펼쳐져 있다. 나를 데리고 온 사람은 사막을 오가던 상인들이 머물던 페스가 상업 도시로 번성하고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는 페스의 역사를 이야기해 준다.


그나마 이어진 길을 따라 여기까지 올라왔지만 길을 모르니 내려갈 길이 태산이다. 그래도 해지기 전에는 내려가야 할 것 같아서 그에게 내려가는 길을 묻는다. 묘지 가이드(?)는 성문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곧장 이 언덕 아래로 내려가 이곳 사람들이 거주하는 골목으로 나를 안내해준다. 함맘(hammam : 대중목욕탕)이나 빵집, 공동으로 사용하는 상수도가 있다는 자랑까지 곁들인다. 그에게 감사의 표시로 10디르함을 건넨다. 겸연쩍은 듯이 돈을 받아 쥐고 그가 다시 묘지로 오른다. 아까 나를 만난 그곳에서 다른 여행자들을 기다리러 갈지도 모른다.
서쪽 언덕 묘지 옆에서 페스의 메디나를 내려다본다. 초록색의 미나렛과 지붕을 한 카라윈 모스크가 랜드마크가 된다. 나를 데려온 사람이 묘지기가 아니라는 것은 애당초 알고 있었다. 이곳을 기웃거리는 여행자에게 설명을 해주고 약간의 가이드비를 챙기는 사람인 것을 알고 따라왔고 경계를 늦춘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선한 눈빛은 안심이 된다.


다시 메디나로 내려오는 길에서 날이 저물어간다. 현지인들의 수크에서 빵이나 채소, 음식을 파는 가게들을 지나 호스텔과 가까운 리프 문(Bob Rif)을 찾아간다. 또다시 길을 잃고 헤매는데 어떤 모로코 남자가 다가와 길을 알려주며 말을 건다. 끈적이는 눈빛으로 남자친구가 있느냐며 그가 이끄는 방향은 이 미로를 온종일 헤맨 내가 언뜻 봐도 가야 할 곳과는 전혀 다른 쪽이다. 넌 거짓말을 하고 있고 나는 길을 안다고 단호하게 말하고는 마치 길을 안다는 듯 쏜살같이 사람들 사이로 걸어간다. 그 사람은 따라오지 못하고 무안한 얼굴로 딴청을 피운다.


저녁을 준비하는 수많은 모로코 사람들이 수크 안을 지나가고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다. 사람들 사이에 묻혀서 호흡을 가다듬는다. 페스에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다 만난다. 그나마 저녁 시장의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이 안심이 되기는 한다. 목말을 태운 귀여운 딸을 데리고 장을 보는 모로코 아빠의 모습이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힌다. 나쁜 의도로 여행자에게 접근하는 사람보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선하게 사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어찌어찌하여 오늘 처음 들어온 문을 찾는다. 아침에 비어있던 광장이 어느새 사람들로 꽉 차 있다. 먹을 것을 파는 수레와 생필품을 파는 노점이 들어서 있고 아이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놀고 있는 광장의 벤치에 사람들이 한가로이 앉아 있다.


해가 지고 있어서 다시 메디나로 들어갈 엄두는 내지 못하고 나도 벤치에 자리를 잡는다. 한낮의 뜨겁던 기온은 뚝 떨어져 바람은 차가워진다. 하릴없는 시간은 흐르고 내 옆의 할머니와 눈인사를 하고 그저 웃고 있을 즈음, 내 모습이 신기한지 아이들이 주위를 맴돈다.
성문을 나와 전통의상을 칭칭 두른 여자들이 노점을 기웃거리는 거리를 지나 호스텔로 발걸음을 옮긴다. 페스의 미로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 낯선 길 위에서 몇 번이라도 길을 잃는 게 당연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페스의 메디나는 두려웠다. 셀 수 없이 길을 잃었지만 덕분에 상상하지도 못한 것들을 보았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 안에서 천년의 삶을 이어오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루살이 여행자는 얼마나 가소롭게 보였을까? 낯선 곳에서의 아주 낯설었던 하루는 길고도 길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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