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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즘] 박근혜 대통령의 ‘유사가족’
최순실 씨 국정개입 논란으로 하루 종일 여론이 들끓던 25일 오후 3시43분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춘추관 브리핑룸에 침울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최 씨가 대통령 연설문과 각종 국무회의 자료를 정기적으로 미리 받아 수정하도록 지시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우리나라 권력 서열 1위는 최순실”이라던 전직 청와대 인사의 폭로에 뜬금없어 하던 많은 국민들은 “이제야 뭔지 알 것 같다”고 끄덕였다. “대통령이 따로 있었다”고 조롱하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박 대통령은 브리핑룸에 들어서자 가라앉은 목소리로 사과문을 읽었다. 476글자를 모두 읽는데 1분40초를 넘지 않았다. 그게 끝이었다. 늘 그랬듯 질문을 받지 않고 곧바로 퇴장했다. 국민들은 청와대가 미리 통지한 엠바고(보도시점 유예) 때문에 이 모습을 15분 후인 4시 긴급 생방송 뉴스를 통해 볼 수 있었다. 긴급 생방송이었지만 15분전 있었던 녹화 영상은 긴장감이 떨어졌다. 

“(최순실 씨가) 선거 전후 보좌진이 갖춰지기 전 연설이나 홍보 등 분야에서 개인적인 의견이나 소감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했다”고 해명했지만, 임기 1년이 지난 이후에도 한참 동안 연설문 뿐 아니라 각종 현안이 담긴 자료가 지속적으로 건네진 데 대한 해명으론 불충분했다.

“진솔하게 사과하려고 직접 나왔다”고 했지만 일방적으로 읽어 내려간 사과문 발표는 ‘진솔’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도대체 뭘 사과한 건지?” 어리둥절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상대방과 ‘소통’하지 않는 사과는 사과가 아니다”란 비판이 쏟아졌다.

돌아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대통령’으로서 국민들의 기대가 높았다. 박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최초의 여성 대통령 당선에 의미를 부여했다.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나 감수성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국정 운영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결혼을 하지 않은 것도 장점으로 비춰졌다. 역대 대통령의 친인척 비리를 목격해온 터라 마땅히 챙겨야할 가족이 없는 여성 대통령이란 점은 부패할 가능성이 낮은 장점으로 여겨졌다. 

집권 3년8개월이 지나면서 이제 이런 기대를 하는 사람들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국정 내내 박 대통령의 꼬리표엔 불통, 독단이 따라다녔다. 기대를 모았던 여성, 노인 등의 사회 약자를 위한 정책은 종적을 감추었다. 자신이 관심 없는 분야엔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 정부에선 사회 곳곳에 필요한 구체적이고 섬세한 정책을 더이상 기대하긴 어렵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젠 피를 나눈 것보다 더 끈끈해 보이는 박 대통령의 ‘유사가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최순실 씨는 박 대통령을 ‘언니’라고 부르며 실세 노릇을 해왔다. 박 대통령은 최 씨가 직접 공수해온 미국산 씨리얼을 즐겨 먹고, 최 씨가 준비한 옷을 입었다. 공식석상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대해 조언을 받았다. 휴가 가서 찍은 사진 가운데 SNS에 올릴 사진까지 의논할 정도로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했다. 

이들 가족에서 정유라 씨는 가장 예쁜 딸이었다. 최순실이 낳아준 엄마면, 박근혜는 사회에서 힘을 주는 엄마 역할을 한 것처럼 보인다. 박 대통령이 정 씨를 위해 문체부 장관에게 특정 국장을 언급하며 "나쁜 사람이라고 한다"고 해 쫓아 내기까지 한 대목에선 가족으로서의 애뜻함이 느껴질 정도다. 이대 특혜 의혹 등에서 드러난 것처럼 정 씨는 대통령의 가족과 같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정 씨가 괜히 '승마공주'로 불린게 아니다.  

국민들은 지금 상황이 답답하다. 대한민국 국민인 걸 부끄럽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더 우울한 건 희망이 별로 안보인다는 점이다. 이런 혼란에서 중심을 잡고, 방향을 제시해야할 국회나 사법 시스템은 무능과 비리로 오랜 기간 실망감만 줬다. 다시 대한민국 국민인 게 화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다시 국회와 검찰을 쳐다볼 수밖에 없다.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지금의 혼란을 누가 바로잡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지 지켜볼 것이다. 어쩌면 지금은 국회나 사법 시스템이나 신뢰를 회복할 최고의 기회일지 모른다. 모두의 건투를 빈다.

jumpcut@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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