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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더스카페] 조선 최초의 뉴타운 북촌은 어떻게 형성됐나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서울의 힙 플레이스 북촌은 흔히 양반가들이 모여 살던 전통적인 동네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부동산 개발업자에 의해 계획적으로 택지를 조성하고 분양한 일종의 뉴타운이었다.

이는 조선 최초의 부동산 개발업자 정세권의 작품이다. 그는 북촌 뿐아니라 익선동, 봉익동,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서대문, 왕십리 등 경성 전역에 한옥대단지를 건설, 경성의 모습을 바꿔놓았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김경민 지음/이마

김경민 서울대 교수가 쓴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이마)는 1920년대 ‘건축왕’으로 불렸던 부동산 개발업자 정세권을 중심으로 일제치하 주택 개발과 격동적인 부동산 시장의 변화를 담은 흥미로운 책이다.

1920년대 경성은 역동적이었다. 일제의 약탈에 따른 빈농의 대거 유입, 산업화, 근대교육의 바람에 따라 인구 유입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인들의 수도 급증, 주거지 부족현상이 사회문제로 대두된다. 일본인들은 청일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주로 일본 공사관이 위치했던 진고개 일대에 몰려 살았다. 이후 남대문로 일대로 확장, 1917년께엔 본정(충무로), 대화정(필동)뿐 아니라 남대문로의 대부분의 필지가 일본인 소유가 된다. 그러나 증가하는 일본인의 수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기존 경성 남부 지역을 넘어 새로운 지역 확장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그러나 미개발지였던 남산 일대를 일본인 거주지로 만든 것과 청계천 이북은 달랐다. 이 지역은 조선인들이 조선왕조 500년에 걸쳐 살고 잇는 전통적인 도시여서 일본인 주거지 건설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제는 도시계획정책의 필요성을 공론화하는 한편 일제의 통치기구를 청계천 이북으로 옮겨 세력권을 주변지역으로 확장하는 북진정책을 추진, 북촌을 점거해나가기 시작한다. 이런 가운데 근대교육과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경성으로 들어온 조선인들도 북촌에 터를 잡으려하면서 토지전쟁이 일어난다.조선인들은 북진하는 일본인들에 맞서 은행 빚을 지면서까지 토지를 지키려고 했지만 힘에 부쳤다. 신규 주택이 나오는 대로 속속 일본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조선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세력, 또는 조직이 절실했다. 이 때 등장한 조직이 건양사의 정세권을 위시한 조선인 출신 신흥자본가계층, 근대적 디벨로퍼들이다. 이들은 주택사업이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했으며, 일부는 민족적 소명도 갖고 있었다.

조선의 디벨로퍼는 관급공사 진입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에서 민간주택 건설 및 개발로 눈을 돌렸다. 이들이 집단적으로 공급한 한옥은 작고 대단지로 개발됐다. 삼청동, 가회동, 익선동에서 볼 수 있는 근대적 한옥집단지구가 그것이다. 인구폭증에 따른 1920년대식 해결책은 큰 대지의 한옥을 철거하고 여러 채의 한옥을 대량으로 공급하는 것이었다. 이 도시형 한옥은 화장실과 거실 등 효율적이고 위생적인 구조로 설계됐다.

이 20세기 퓨전한옥이 ‘경성의 건축왕’으로 불린 정세권의 작품이다. 그는 중류층 이하의 계층을 위해 월부로 집을 구입할 수 있게 하는 등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다.

저자는 “조선의 디벨로퍼들의 존재는 단순히 조선식 한옥을 대량으로 공급했다는 측면을 넘어서서 일제강점기경성 내부 특히 유일한 조선인 거주 공간이었던 북촌을 지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한다.

안목이 남달랏던 정세권은 1919년 상경당시 2만원의 자산을 갖고 시작했는데 10년도 되지 않아 조선을 대표하는 부동산 재벌이 된다. 그는 부동산 대폭락장에서도 적정가격의 주택공급으로 이를 극복했고 뉴스테이(민간임대주택)사업에서도 선도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의 경성개발은 세 시기로 구분된다. 1920년대의 개발은 사대분 내부, 특히 북촌에 집중된다. 1930년대에는 사대문 외곽지역, 즉 창신동, 서대분, 성북동 등을 개발했다. 일종의 뉴타운 신도시개발이다. 마지막은 1940년대 이후왕십리와 행당동 집중 개발이다.

왕십리는 정세권이 일제(동양척식회사)와 부딪힌 격전지였다. 1930년대 초 정세권은 뚝섬으로부터 왕십리 방향으로 토지가 나오면 매입하기 시작했다. 당시엔 빈민들이 몰려사는 동네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정세권의 견해는 달랐다. 반면 일제는 대경성개발계획에 따라 왕십리 일대와 보문동 일대를 새로운 뉴타운으로 개발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전략적 차원에서 이 지역들을 교통망으로 연결, 일본인 진출을 용이하게 하고 조선인들을몰아내려는 의도였다. 당시 조선인은 공간적으로 북촌지역에 몰려 있어 일본인 주거지가 포위하는 형국인데다빈곤한 조선인들은 더 먼 지역으로 쫒겨나는 상태였다. 조선인 주거지의 분절을 가져올 수 있는 상황에서 왕십리 토지전쟁은 도시계획, 개발사적 의미가 남다르다는게 저자의 평가다.

이 책은 근대화 도시의 개발과정과 식민지의 특수한 현실에서 주택시장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보여준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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