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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신라 효성왕 무덤은 만들다 말았을까…낭산서 미완성 왕릉 발견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경주 북천 남쪽 황복사지와 선덕여왕릉 사이 낭산 일원(사적 제163호)에서 통일신라 효성왕(재위 737∼742)을 위해 조성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미완성 무덤이 발견됐다.

효성왕은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자 경덕왕의 형으로, 불과 5년간 재위하다 병사한 뒤 무덤에 묻히지 않고 화장됐다. 화장된 효성왕의 시신은 동해에 뿌려졌다고 기록은 전한다.

[사진설명=경주 낭산에서 발견된 미완성 왕릉]

문화재청은 성림문화재연구원이 경북 경주시 구황동 100번지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봉분이 붕괴하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돌인 탱석(撑石)과 기단을 형성하는 평평한 돌인 면석(面石), 대석(臺石) 위에 올리는 돌인 갑석(甲石) 등 유물 300여 점을 발견했다고 9일 밝혔다.

이 석재들을 근거로 무덤의 규모를 추정한 결과, 지름이 약 22m에 달해 765년께 만들어진 경덕왕릉과 크기가 비슷한 것으로 드러났다.

석실 내부를 만들기 위한 부재가 나오지 않았으며, 탱석의 십이지신상이 잘려 나간 점으로 미뤄 왕릉을 축조하던 중에 공사가 중단됐던 것으로 보인다.

성림문화재연구원 관계자는 “십이지신상의 양식을 봤을 때 경덕왕릉의 석상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짐작되고, 무덤을 만들다 중지했기 때문에 당시 재위 기간이 짧았던 효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사진설명=낭산 미완성 왕릉에서 출토된 유물]

효성왕은 즉위된 직후 신라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당(唐) 현종으로 부터 개부의동삼사신라왕(開府儀同三司新羅王)에 책봉됐다.

재위 중 이렇다할 정치적 이슈는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왕위 계승도 순조로워, 효성왕은 즉위한뒤 2년만에 동생 헌영(경덕왕)을 태자로 책봉하는 등 효성왕은 권력 세습에 대한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의 가장 큰 고민은 왕비와 후궁간 다툼이었다. 서기 740년 왕비가 후궁을 질투한 나머지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이에 후궁의 아버지이자 고위 귀족인 영종이 반란을 일으켜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반란은 어렵지 않게 진압됐지만, 효성왕의 심신을 크게 해친 중대 사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효성왕은 내가 죽거든 화장한 뒤 동해에 뿌려달라고 명하고는 진행하던 왕릉 조성 작업을 중단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 주변에서는 8∼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담장, 회랑터, 너비 16∼17m의 도로 유적이 나왔다. 또 ‘습부정정’(習部井井), ‘습부정정’(習府井井)이라는 글자가 있는 명문 기와와 귀면와(鬼面瓦) 등도 출토됐다.

성림연구원측은 “원석을 무덤 주변에 가져와 가공하고, 석재를 볼록하거나 오목하게 처리해 끼워 맞췄다는 사실도 파악했다”며 “신라 왕릉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기술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왕릉은 왕이 죽기 전에 미리 조성 작업을 해둔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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