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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즘] “할 일을 했을 뿐”이란 말의 두 얼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지난 6일 창원시 성산구 귀산터널에서 발생한 6중 추돌 사고 당시 신속한 초기 대응으로 초대형 인명피해를 막은 해군 부사관(상사) 배송대(40) 씨가 주변의 칭찬에 부끄러운 듯 남긴 말이라고 한다. 배 씨는 당시 차를 몰고 터널을 지나다 우연히 현장을 목격했다. 즉시 차를 세우고 우왕좌왕하는 시민 수십여명을 터널 밖으로 대피시켰다. 차량 6대중 2대에서 불이나 차체가 전부 타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 보면 이런 미담 사례는 꽤 많다. 군인, 소방서 구급대원, 경찰 등이 급박한 상황에서 영웅적인 구조 활동을 벌인다. 그들은 대부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거의 반사적으로 움직였다’며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태도를 보인다. 자기 일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자기 일이라고 해도 슬쩍 남에게 미루고 외면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자기 일로 여기고 할일을 했다.

‘단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은 상황에 따라 ‘자기 합리화’ 수단으로 쓰인다. 업무상 배임 혐의로 기소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민정수석으로서 일을 했다. 그냥 나의 일을 한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개혁 대상 1호로 주목되고 있는 검찰도 우 전 수석의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충분히 할 수 있던 업무”라고 대신 변명해 논란을 키웠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사상검증을 통해 각종 지원에서 배제한 혐의를 받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조윤선 전 문화체육부장관도 마찬가지. 그들은 “과거 정권에서도 있었던 일”이라거나 “시켜서 한 일” 혹은 “할 일을 한 것”이라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할 일을 한 것일 뿐’이라는 태도는 어떤 경우든 진심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들은 정말로 그게 ‘나쁜’ 행동인지, 혹은 ‘대단한’ 행동인지 몰랐을 수 있다.

윤리학을 철학의 한 분야로 체계화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이나 악은 대체로 습관의 문제’라고 정의했다. 그는 사람들이 흔히 ‘본의 아니게’, ‘모르고서’, ‘습관적으로’ 했다는 무수한 행동을 분석했다. 그 결과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오랜 기간 버릇과 습관에 의해 그렇게 형성된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이 옳은지 지속적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한 사람은 급박한 상황에서도 선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 뛰어난 야구 선수가 의식적으로 공을 잘 던져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잘 던지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쁜 짓을 저지르고도 그게 나쁜 짓인지 모를 수 있다. 그저 그런 태도가 몸에 배었을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고 직간접적인 폭력을 휘두른 후, 그저 ‘모르고서’, 혹은 ‘업무상 필요해서’ 한 일이었다고 태연히 변명할 뿐이다. 그런 사람은 오랜 기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으로 나쁜 행동을 해왔고, 그렇게 나쁜 사람이 됐을 뿐이다.

당신은 ‘내 할일을 했을 뿐’이라는 말을 언제 쓰고 있나? 업무나 특정한 상황 뒤에 숨어 맹목적으로 행동한 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쓰고 있는 건 아닌가? 당신은 착한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jumpc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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