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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걷는 즐거움, 그것이 인간성에 주는 의미는
2015년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책으로 한국에 이름을 알린 문화비평가이자 인권운동가인 리베카 솔닛은 요즘 가장 핫한 작가 중 하나다. ‘맨스플레인’(Man+Explain)이라는 용어를 유행시킨 그는 국내 페미니즘 논쟁에 불을 댕기기도 했다.‘강남역 살인사건’으로 불거진 페미니즘 논쟁이 ’문단내 성추행 사건’으로 확산, 사회 각 분야에서 논쟁거리를 만들어내는 중이다.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최근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솔닛의 저서 중 ‘걷기의 인문학’(반비)은 사회문제를 과감한 언어로 폭로한 여타 에세이와 달리 걷기란 행위를 역사, 철학, 문학, 생리적으로 깊이있게 파고든 솔닛의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걷기를 탐구와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 건 솔닛에겐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늘 한 걸음 내딛기를 강조해왔다. 그 한 걸음이 변화와 역사를 만들어낸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새로운 장소는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가능성이다. 세상을 두루 살피는 일은 마음을 두루 살피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세상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 다녀야 하듯, 마음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 다녀야 한다.”

그 시작은 반핵활동가로 활동하던 1980년대였다. 봄이면 네바다 핵실험장을 찾아 시위를 벌인 그가 선택한 저항은 바로 걷기였다. 그에게 애초 걷기는 이처럼 다른 일의 수단이었다. 힘들 때 불안을 떨치기 위해, 일을 하기 위해 혹은 일을 쉬기 위해 걸었다. 그런 활동이 이어지면서 그는 걷기의 마법을 발견한 듯 싶다.

그는 “이상적으로 볼 때 보행은 몸과 마음과 세상이 한 편이 된 상태”라며, “오랜 불화끝에 대화를 시작한 세 사람처럼 문득 화음을 들려주는 세 음표처럼, 걸을 때 우리는 육체와 세상에 시달리지 않으면서 육체와 세상 속에 머물 수 있다”고 말한다.

솔닛은 무의식적 행위인 보행이 의식적 문화행위로 새롭게 인식된 시점을 18세기 철학자 루소에게서 찾는다. 루소는 “나는 걸을 때만 사색할 수 있다. 내 걸음이 멈추면 내 생각도 멈춘다”고 ‘고백록’에 썼다. 걷기를 철학적 사유와 처음으로 연결시킨 것이다.키에르케고르, 후설도 걷는 행위를 철학적으로 들여다봤다.

보행이 즐거움 자체가 된 것은 정원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귀족의 집이 요새에서 대저택으로 바뀌면서 18세기초 유럽의 정원은 넓어지고 정원에는 걸을 수 있는 보행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하하(ha-ha)담장이 생기면서 담장이 없어졌다. 멀리에서 잘 보이도록 움푹한 도랑을 파서 만든 하하 담장 덕분에 정원 밖을 내다보는 사람들은 시원한 전망을 얻을 수 있게 됐다. 시골 영지를 소유한 귀족들이 사유지 공원안에 보행로를 만들면서 보행은 사냥, 승마 못지않은 사유지 공원의 즐거움 중 하나로 부상한다. 정원이 바깥세상과의 경계를 넘어 세상 속으로 녹아들어가 자연관광시대가 비로소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전의 길은 성지순례나 실용목적으로 기능했다. 그런 고통스런 여정에서 길은 감상의 대상,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오늘날 자연을 감상하러 떠나는 여행은 바로 정원산책에 뿌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땅을 밟는 것이 이상적 존재방식이라고 여기는 솔닛은 진화론적 관점을 통해 인류의 직립보행이 인간성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핀다. 몸의 변화가 생각, 의식을 불러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솔닛은 또한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 마냥 걷는 성지순례길에서, 순례가 믿음과 행동의 결합, 정신과 물질의 화해, 생각과 실천의 결합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순례를 ‘경계선’ 상태로 본다. 지위와 권위를 빼앗긴 사람, 권력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구조에서 쫒겨난 사람, 스스로 수련과 고행을 통해 밑바닥으로 낮아진 사람들이 순례자, ‘문턱을 넘어간 사람들’이라는 것. 바로 이 지점에서 순례는 신의 은총을 바라는 것에서 정치적 변화를 요구하는 행위로 바뀌게 된다.

솔닛은 걷는 행위가 점점 위협받는 현실을 지적하기도 한다. 걷기란 바깥, 즉 공적공간에서 이뤄지는데 그런 공간들이 점점 잠식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적 공간이었던 곳이 주차장이 되고, 도심 중앙로가 쇼핑몰 통로로 바뀐다든지 기술적 편의, 즉 자동차나 쇼핑몰 등으로 바깥과 단절되고 있는 현실이 그렇다.

솔닛은 역사, 철학, 정치, 문학, 예술비평 등 인문학의 전통과 개인적 경험을 함께 엮어가며 풍부한 걷기 여정을 만들어낸다. 걷는 사람들과 모임, 걷는 장소들, 걷기의 형태와 종류, 걷는 일을 담은 문학과예술, 걷는 신체의 구조와 진화, 자유롭게 걷기의 사회적 조건 등 걷기의 모든 요소를 총망라했다. 책은 걷기의 속성을 닮아 생각의 길이 다양한 샛길로 빠져나가기도 하면서 풍요로운 걷기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책에는 저자가 한국 독자들에게 보내는 특별한 서문이 들어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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