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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항 르포]초등생도 할아버지도…‘포항의 눈물’ 닦아준 천사들
-흥해체육관 지진대피소 하루 400명 헌신 봉사
-지진 트라우마 극복 상담ㆍ휴가낸 군인도 달려와
-“이재민들 마음의 안정…저라도 도와야죠”

[헤럴드경제(포항)=김진원ㆍ김유진 기자]“밥은 나중에 먹어도 돼요.”

최연소 자원봉사자인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장성초등학교 3학년 정재찬(10) 군은 자기 몸통만한 크기의 급식판을 닦으며 말했다. 정 군은 포항시 흥해체육관 지진대피소에서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빨간색 고무장갑을 털었다.

기자가 봉사활동을 돕겠다고 나서자 누군가 “재찬아 누나한테 자리 비켜드려”라고 말했다. 정 군은 좌식 의자를 한쪽으로 끌어 앉았다.
22일 저녁 포항 흥해체육관에서 만난 지진 피해 자원 봉사자들 [사진=김진원ㆍ김유진 기자]

지진이 평범한 일상을 산산조각낸 포항에서 이재민들은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자원봉사자들의 손길 덕분이다. 22일 찾은 포항시 흥해체육관 지진대피소에는 마음의 고통까지 어루만져 줄 심리상담부터 허한 속을 데워 줄 소박하지만 따뜻한 한끼 식사까지 준비돼 있었다.

지진 트라우마를 겪은 이재민을 위해 마련된 심리상담 부스에서는 이순미(61) 씨가 만다라 문양을 색칠하며 마음 속 잡념을 털어낼 수 있게 돕고 있었다. 이 씨는 진앙지와 가까운 포항 북구 주민이다. 이 씨는 “지진이 또 나면 대피하려고 옷도 다 입고 손에 현관키를 꼭 쥔 채 불 켜고 선잠을 주무시거나 온 가족이 신경이 예민해져 변비와 설사에 시달리고 있다는 분들도 계시다”며 “저도 북구에 살기 때문에 같은 처지라고 생각한다. 내가 온전해야 그분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에 저부터 몸과 마음을 잘 추스르겠다”고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지진 이재민을 위해 마련된 작은 도서관도 있었다. 포항시 이동도서관을 지키던 자원봉사자 김성순(74) 씨는 “이곳은 대출기간이 없는 특별한 도서관이다. 이재민 분들이라면 누구든 두 권 씩 마음 편히 읽으실 수 있도록 준비했다. 일부러 책마다 붙이는 도서번호를 부착하지도 않았다.”며 웃어보였다. 어제 설치된 이동도서관에서는 현재까지 36권의 책이 이재민 독자들의 놀란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있다.

자연재해로 인해 평범한 일상이 위협 받는 상황 속에서도 ‘두근두근 내 인생’,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 ‘가슴 뛰는 삶’, ’멋지게 나이들어 가는 법’ 처럼 삶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서적을 대출해 간 모습이 눈에 띄었다.

김 씨는 “이곳에서 봉사하면서 정말 따뜻한 마음이었다. 특히 급식소에서 나눠드리는 음식을 드시면서 ‘집에서도 이렇게 못 먹고 살았다’며 감사함을 전해주셔서 정말 행복했다. 구호물품이 전국에서 오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대한민국 만세’란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대구에서 포항으로 달려온 봉사자 채명희(57) 씨는 “가까운 지역인데 당연히 와봐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채 씨는 “지진이 난 후로 한참 쓰러져 계셨다는 할머님이 찾아오셨다. 아는 분 집에 얹혀 있는 게 눈치보여 낮 동안 있을 곳을 찾아 급식소에 오셨더라. 혼자 있는 게 너무 무섭다고 하셔서 따뜻한 차도 드리도 손도 꼭 잡아드렸다. 내일도 꼭 오시라고 신신당부 했다”면서 여전히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날 최고령 봉사자는 포항시 마사지 봉사팀의 전광호(74) 씨다. 자원봉사센터에 따르면 전 씨는 “좁은 텐트에서 지내다보면 근육도 뭉치고 두통도 온다”며 이날 하루 흥해 체육관에서 이재민 50여명에게 마사지 봉사를 했다는 후문이다.

이날까지 흥해체육관에는 매일 300~400명의 자원봉사자가 꾸준히 찾아오고 있다. 흥해체육관 옆에 마련된 자원봉사자센터에는 파주ㆍ부산 등 전국에서 몰려든 자원봉사자 명단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자원봉사센터에 따르면 가장 먼저 연락이 온 곳은 지난해 지진 피해를 입은 경주다. 지진 피해의 아픔을 먼저 겪은 만큼 포항의 눈물도 가장 먼저 닦아주러 왔다는 후문이다. 덕분에 흥해체육관 이재민들은 첫날 세끼 따뜻한 식사를 먹을 수 있었다.

이상섭 포항시 자원봉사센터 사무국장은 “이재민 중에도 봉사자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며 돕고싶다고 나서는 분들이 계시고 휴가 나온 군인들이 소중한 하루를 반납하고 봉사하기도 한다. 광주에서 온 한 봉사자는 ‘밥이 불편하면 속이 메스껍고 더부룩하다’며 소화제를 한 박스 껴안고 오기도 했다”며 “이 자리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 국장은 “감사하게도 너무나 많은 도움의 손길이 오고 있다. 다만 상대적으로 봉사자 수가 적고 일거리는 많은 오전 7시~9시, 오후 5시~8시에 방문해 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kace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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