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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VR의 아버지’ 러니어가 말하는 가상현실의 모든 것
인간이 창조한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착각이 본질

오락용 제품부터 존재증명·공감까지 다양
가상현실에 적응하면 물질성에 더욱 민감
기술 발전해도 인간의 인지감각 넘진 못해


“VR의 표현력이 궁극적으로 얼마나 커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VR이라는 아이디어에는 언제나 작은 흥분의 고갱이가 들어 있다. 모든 경험을 자신의 통제하에 남들과 대화적으로 공유하는 것, 총체적 표현 형태에 대한 접근법, 자각몽의 공유, 지긋지긋한 물질성에서 벗어나는 것-우리는 이것을 추구한다.”( ‘가상현실의 탄생’에서)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으면서도 또한 이토록 소름끼칠 수 있는 매체는 일찍이 없었다. 가상 현실은 우리를 시험할 것이다.”

1985년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고안한 ‘가상현실의 아버지’, 재런 러니어가 새 저서 ‘가상현실의 탄생’(열린책들)에서 한 이 말은 가상현실의 특성과 본질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가상현실의 치명적인 속성은 인간이 창조해온 환상을 영화처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환상 속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데 있음을 의미한다.


이 책은 2016년 출간된 ‘미래는 누구의 것인가’의 후속작으로, 전작이 디지털 세상, 정보 기술 등 컴퓨터 기술의 명암과 미래를 집중적으로 탐색했다면, 이번 책에선 그가 처음으로 고안하고 상용화한 가상 현실이 무엇인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경험을 통해 들려준다. 책은 그의 드라마틱한 삶의 여정과 가상현실에 대한 탐구가 교차하는 형식으로 구성, 냉온탕을 오가거나 선택적으로 읽을 수 있다.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러니어는 가상현실을 52가지로 정의해 나간다. ‘다른 장소, 다른 몸,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한 다른 논리의 환각을 만들어내는 오락용 제품’ 등 일반적인 정의부터 ‘인지적 관점에서 현실은 다음 순간에 대한 뇌의 예상이다. 가상 현실에서 뇌는 잠깐 동안 실제 사물이 아니라 가상의 사물을 예상하도록 설득된다’ 는 뇌과학적 풀이까지 폭이 넓다. 또 ‘다른 사람의 처지에 서게 해주는 매체이자 공감을 늘리는 길’등 VR의 다양한 특성을 확장시켜 나간다.

가상현실과 현실을 오갈 때 우리 지각과 인식에 어떤 변화가 오는지 예민하게 포착한 존재론적 정의도 시선을 끈다.

그는 “가상 세계에 일단 적응한 뒤 현실로 돌아오면 소우주에서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며, 싸구려 목재나 흙 같은 평범한 표면이 잠시나마 무한히 다채롭게 느껴진다고 설명한다.

“가상현실에서는 경험의 모든 요소를 하나하나 없앨 수 있다. 이를테면 방을 없애고 시애틀로 대체한다. 그런 다음 몸을 없애고 거인의 몸으로 대체한다. 모든 조각이 사라져도 남은 것을 경험하는 나는 여전히 그대로이다. 가상현실은 현상을 벗겨 냄으로써 그럼에도 의식이 남아있고 진짜임을 드러낸다.”

모든 것이 달라져도 모든 존재하는 것을 경험하는 나는 중심에 그대로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얘기다.

가상현실의 미래에 대한 그의 생각은 친기술주의자로서의 입장으로는 의외다. 러니어는 가상현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의 지각 수준에 도달하지 못할 것으로 본다. 인간의 몸은 수 억년에 걸친 진화의 결과로, 고품질의 VR은 인간이 물질성을 파악하고 향유하는 능력을 더 정교하게 만들기 때문에 언제나 인간은 저 만치 존재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지각은 고도화, 섬세화돼 현실과 환각을 구별하는 능력이 발전하게 될 것으로 본다.

책은 러니어가 만든 최초의 장갑, 최초의 모의수술 장비 등 VR 초창기부터 기술발전 과정은 물론, VR의 어두운 면, VR 구현하기, AI까지 때로 영감을 주는 은유로 컴퓨터와 인간의 관계를 그려나간다. 그의 야심작인 표면지향 소프트웨어, 최근 연구중인 가상의 사물이 현실 세계안에 존재하는 ‘혼합 현실’(mixed reality)까지 VR의 발전사와 논쟁, 과제까지 담아냈다.

가상현실보다 더 드라마틱한 그의 삶의 여정 역시 지나치기 어렵다.

그의 부모는 태어나자 마자 뉴멕시코주와 멕시코가 만나는 미국 엘패소 외곽 오지, 가난과 무법천지인 곳에 자리잡았다. 유태인 이민자 가정으로 세상의 경계에 놓인 이들이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랐으며, 아침마다 스쿨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멕시코 시우다드후아레스에 있는 몬테소리 학교에 다녔다. 바흐의 음악과 보스의 환상적 그림에 심취했던 어린 시절, 어머니의 사고사와 학교에서의 따돌림, 빨대 모형을 토대로 돔집을 만든 얘기 등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5G 시대가 본격화하면서 AR(증강현실), VR 서비스가 다양해질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가상현실이란 무엇인지 이해하는 입문서로 제격이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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