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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단주의 아닌 사회질서 있는 개혁이 ‘진정한 보수’다
英정치인 노먼 ‘에드먼드 버크’ 사상 재조명
18세기 혁명시대 ‘보수주의 아버지’로 주목
진정한 개혁 핵심은 사회 전복·훼손 아닌
사회적 요구·불만 줄여 사회 강화하는 것
극단주의·권력남용 반대…일관되게 투쟁
길 잃은 한국 보수·진보 모두에 방향 제시
“사회는 주로 이성이 아니라 감성의 산물이며 상향식으로 구축된다.(…)그리고 그 영역, 도덕적 관심사의 범위는 개인이나 집단이나 계급이나 세대가 아니라 세월이 흘러도 지속되는 사회질서 자체다.”(‘보수주의의 창시자 에드먼드 버크’에서)

궤멸직전의 50년대 미국 보수주의를 일으켜 세우는데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 책 중의 하나가 러셀 커크의 ‘보수의 정신’(The Conservative Mnd)이다. 1953년에 쓴 박사논문이 당시 책으로 출간된 것도 이례적인데, 이 책은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며, 커크는 단숨에 보수의 대부가 된다. 커크는 책에서 보수주의의 사상적 흐름을 짚고, 보수의 지향점으로 점진적인 개혁, 물질을 넘어선 정신성, 전통과 위계질서, 재산권 보호와 개인의 자유 등을 꼽았다.

보수의 사상적 계보에서 커크가 시조로 꼽은 인물은 영국 휘그당의 에드먼드 버크. 버크는 프랑스혁명을 지켜보고선 기존의 질서를 바탕으로 한 점진적 개혁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폈다.

보수주의의 창시자 에드먼드 버크/제시 노먼 지음/홍지수 옮김/살림

잘 알려지지 않은 정치가이자 사상가 버크의 사상과 생애를 다룬 평전이 국내 첫 번역 출간됐다. ‘보수주의의 창시자 에드먼드 버크’(살림)는 영국 현직 하원의원이자 영국 중도 우파 싱크탱크인 폴리시 익스체인지의 선임연구원인 제시 노먼의 역작이다. 노먼은 방대한 양의 사료를 바탕으로 버크와 마찬가지인 직업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철학과 경험에 비춰 그의 사상을 나름대로 해석했다.

책은 버크의 생애와 사상을 1, 2부로 나눠 다룬다.1부에서는 아일랜드에서 나고 자란 어린 시절부터 잉글랜드에서 정계에 입문, 하원으로 활동하고 인생의 정점에 ‘프랑스혁명에 관한 고찰’을 집필한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복잡한 정치상황과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보여준다. 저자는 방대한 양의 팸플릿과 연설문, 서신, 책, 잡지, 신문 그림 등 풍부한 사료를 취합해 입체적이고 생동감있게 그의 생애와 18세기 영국정치 풍경을 그려낸다,

저자가 무엇보다 주목한 건 20대의 버크가 쓴 초기 네 개의 글이다. 이들은 버크가 평생 추구한 사상의 틀을 이미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첫번째 글인 ‘자연발생적인 사회를 옹호함’은 폭정과 귀족정치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과 문명에 대한 옹호를 풍자적으로 쓴 글로, 평생 주창해온 버크 사상의 핵심이 다 들어있다. 두번째 글인 ‘숭고함과 아름다움이라는 우리의 사상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미학과 철학의 본질적 질문을 담고 있으며, 뇌과학이 발전한 21세기에서 돌아볼 때 그 통찰이 놀랍기만 하다.

순탄치 않은 정치여정에서 버크는 수많은 연설과 글을 통해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펼쳤는데, 그의 정치투쟁은 일관된다. 아일랜드 가톨릭교도에 대한 평등한 대우 등 종교적 관용과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억압 반대, 행정권력과 왕실의 공직 임명 권한을 헌법적으로 제약할 것, 동인도회사가 휘두르는 기업권력 반대 등이다. 이런 면에서 버크는 계몽주의적 이상을 실천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버크 사상의 핵심은 개혁보다는 사회의 질서와 보존에 놓인다.

“버크의 관점에서 보면 진정한 개혁은 사회를 전복시키거나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진정한 개혁은 사회적 요구를 해소하고 불만을 줄임으로써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회를 강화한다.” (279쪽)

여기에서 버크는 혁명을 정당화한 계몽주의와 갈라진다. 버크는 인간이 자의적인 이성에 이끌리는 존재라기보다는 본능과 감정에 좌우되는 피조물로 봤다. 공동체의 전통과 지혜는 이런 본능과 감정을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으로 소중하다는 것이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프랑스혁명은 인간의 오랜 역사와 경험, 지헤를 무시하고 추상적인 권리를 쟁취한다는 미명하에 사회질서를 뒤엎은 폭력에 불과하다고 봤다.

버크는 또한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보고 인간의 인간다움도 사회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사회질서는 인위적인 설계가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우연히 형성된 것으로 모든 계층의 ‘예의범절’로 유지되며 이것이 법의 근간이 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회가 질서정연해질 때 그 결과물로 개인에게 진정한 의미의 자유도 주어진다고 봤다. 정치인의 역할은 바로 이런 사회질서를 존중하고 온전히 유지시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회변화를 반대한 건 아니다. 버크는 공공의 사회질서 유지에 해가 되는 것은 가차없이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버크의 적은 진보주의가 아니란 얘기다, 사회질서와 공공선에 해가 되는 모든 종류의 극단주의와 권력 남용이야말로 버크의 투쟁대상이었다.

인간사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버크의 통찰력과 선견지명은 마치 앞날을 예견한 것처럼 적중했는데, 영국이 아일랜드를 통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메리카 식민지와 프랑스혁명의 결과를 그는 내다봤다.

버크의 사상은 자기 정립을 못한 한국의 보수는 물론 길을 잃은 진보에도 울림을 준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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