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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가 잊은 중일전쟁의 진실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1일 히틀러의 탱크 부대가 폴란드 국경을 침범,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됐다는 게 통설이다.

영국 옥스포드대 국제관계학과 래너 미터 교수는 ‘중일전쟁:역사가 망각한 그들 1937~1945’에서 전쟁의 시계를 이 보다 2년 전으로 돌려놓는다.

1937년 7월7일 중국 베이징 근교에 있는 루거우차오(일명 마르코 폴로 다리)에서 벌어진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우발적인 총격전이 그 시발이라는 것이다. 다리를 놓고 양 쪽의 공방전이 벌어지고, 나흘 뒤 일본군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이면서 이 사건은 마무리되지만 이를 계기로 일본은 중국 침략을 본격화, 2차 세계대전의 한 축을 형성한다는 설명이다. 특히 2차 대전이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히틀러의 자살로 끝난 게 아니라 추축국의 하나인 일본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맞고, 1945년 9월2일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끝났기 때문에, 시작 역시 일본군이 중국과 전면전에 돌입한 1937년을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일전쟁’은 래너 미터 교수를 세계적인 전쟁사가로 주목받게 만든 문제작이다. 잊혀진 중국의 8년간의 대일항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복원한 책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중국의 역할을 새롭게 조명한다. 중국은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의 동맹, 즉 추축국의 맹공격에 직면한 첫 번째 국가였으며, 수많은 일본군을 중국 본토에 묶어놓음으로써 연합군의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게 요지다. 사실 진주만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중국은 4년동안 혼자 힘으로 일본과 싸웠다. 고도의 군사력을 지닌 일본군 80만명을 대륙에 묶어둔 것이다. 희생은 컸다. 1500만명이 죽고 근대화의 기틀이 붕괴돼 폐허가 됐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서 중국은 제국 식민주의 피해자에서 벗어나 잠정적인 패권국가로 도약하게 된다. 중국 지도층에도 변화가 생긴다. 장제스는 중일전쟁의 중심에서 결과적으로 승리했지만 국가를 잃었고, 농촌의 우두머리에 불과했던 마오쩌둥은 중국지도자로 올라서게 된다.

그렇다면 왜 이 시점에 중일전쟁인가. 저자는 중국이 어떻게 강대국으로 부상했는지 그 단초가 중일전쟁에 있다고 본다. 급변하는 국제질서에서 중국의 역할과 정체성의 변화를 이해하려면 감추어진 과거, 중국이 무엇을 했는지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중일전쟁은 그동안 서구엔 잊혀진 전쟁이다.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데서 벌어졌고, 중국 외엔 관련성이 없기 때문으로 치부한다. 중국의 항전 노력, 특히 국민당 정권의 역할에 대해서도 서구는 비판적이다. 장제스 정권의 부패와 대중적 지지 상실을 지적한다.

이와 관련, 저자는 국민당의 장제스의 몰락의 배경으로 연합군의 전략을 지목한다.장제스가 연합국의 전략적 이익에 부합하도록 강요당했다는 주장이다. 그 결과 자신들의 이익에는 위배되는 방식으로 군대를 배치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국민당의 몰락은 맹목적 반공과 항일의 포기, 전략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신뢰할 수 없는 동맹국들 때문이었다고 저자는 일갈한다.

중일전쟁은 그동안 장제스 지우기의 일환으로 중국내에서도 잊혀졌다가 21세기 초부터 발굴, 재조명되고 있다. 저자는 “그들이 고통과 저항, 그들이 강요당한 끔찍한 선택들을 인정하면서 서구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 또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우리 자신의 집단 기억을 가다듬어야 한다”고 마무리했다. 중일전쟁을 세계적 시각에서, 또 각국의 입장에서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논의의 출발점을 제공한다.

이윤미 기자/meelee@yheraldcorp.com

중일전쟁/래너 미터 지음, 기세찬·권성욱 옮김/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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