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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찬숙 “12년 만에 올림픽 진출…은메달 감동 재현해주길” [메달리스트]
메달리스트 인터뷰 ④ 박찬숙

〈편집자주〉 우리나라는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최초로 출전해 종합순위 32위를 기록했습니다. 이후 2004년 아테네 올림픽부터 꾸준히 10위 안에 진입하며 스포츠 강대국으로 도약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올해 예정된 도쿄 올림픽은 2021년으로 미뤄졌지만 [메달리스트]를 통해 그 아쉬운 마음을 달래보세요. [메달리스트]는 한국 스포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메달리스트를 만납니다.

[헤럴드경제] 1984년 LA 올림픽에서 여자농구 대표팀은 4승 1패의 성적으로 2위에 올라 대한민국 구기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런 ‘최초’의 기록에 국민들은 여자농구에 열광했고 그 중심에는 박찬숙(61)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유소녀농구 육성본부장이 있었다.

박찬숙은 1979년 서울 세계선수권대회 은메달,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은메달을 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국가대표팀의 주전 센터로 활약했다. 그는 17세에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되는가 하면 국내 여자농구 최우수선수상 등을 휩쓸며 최고의 스포츠 스타로 떠올랐다. 현역 은퇴 후에도 꾸준히 국내외에서 코치, 감독, 해설위원 등 지도자의 길을 걸으며 후학양성에 힘쓰다 현재는 WKBL 유소녀농구 육성본부장의 자리에서 한국여자프로농구의 부흥을 위해 노력 중이다.

침체된 여자농구, 자존심 지킬까

한국 여자농구는 지난 2월 세르비아에서 막을 내린 도쿄올림픽 최종예선에서 조 3위로 본선 진출권을 따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8강 진출 이후 삼수 만에 따낸 올림픽 무대다.

“세계 벽이 높은 올림픽에서 구기 종목으로 출전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거든요. 이번에 여자농구가 도쿄올림픽 티켓을 딴 것에 대해서는 정말 격려해주고 싶어요. 후배들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는 말이지만 저는 항상 선수들에게 선배들이 한 만큼만 해달라고해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2위, 올림픽에서 은메달. 어떻게 보면 최선을 다해달라는 충고죠.”

여자농구는 1970~80년대 ‘여자농구 황금기’를 보낸 세대가 모두 은퇴하면서 침체 일로를 걸어왔다. 아시아 정상권에서도 멀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올림픽 무대 복귀는 여자농구의 재도약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둘 수 있는 성과다.

1979년 서울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 왼쪽부터 조은자, 정미라, 강현숙, 박찬숙, 조영란.

올림픽에 대한 두려움, 은퇴까지 생각해

박찬숙이 농구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특별하지 않았다. 단순히 “키가 컸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박찬숙은 “맨땅에 헤딩하는 식”이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농구를 시작하면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쓰고 나면 항상 눈물바다였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으니 답이 없었거든요. ‘내가 왜 해야 되는 거지? 이게 뭘까?’ 이런 질문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질문에 대한 답이 하나씩 나오니까 실력도 따라오더라고요.”

LA 올림픽을 앞두고 무릎 연골 파열 부상을 당해 재활 중이던 박찬숙은 “은퇴와 복귀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고백했다.

“그 순간에는 ‘LA 올림픽에 나가봐야 메달도 못 딸 텐데 부상 핑계로 이참에 은퇴나 하자’ 이런 야비한 생각을 했었어요. 솔직히 우리가 다 져봤던 나라랑 다시 붙어야 하니까 올림픽이 무서웠던 거죠.”

그의 마음을 돌린 건 당시 여자농구 대표팀을 이끈 조승연 감독이었다. 박찬숙은 “당시 조 감독님이 ‘부상당했다고 여기서 엎어질 거냐 아니면 다시 재기해서 화려하게 은퇴할 거냐’고 물어보셨다”면서 “그 순간 정신이 들어 코트에 복귀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중공(현재 중국)과 경기를 할 때 이기면 2위 확보였고 지면 3~4위전으로 떨어지는 거였는데 정말 120%를 발휘하면서 경기를 치렀어요. 2m4㎝ 정하이샤, 2m16㎝ 진월방이 무섭지가 않더라고요. 그렇게 중공을 이기고 은메달을 목에 걸었어요. 선수들끼리 모여서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면서 서로 꼬집어봤죠. 미국은 이길 수가 없었어요.(웃음)”

뛰어난 실력으로 LA 올림픽 은메달을 견인한 박찬숙은 당시 남달랐던 인기를 회상하며 선수 시절 일화들을 소개했다.

“팬레터를 정말 많이 받았는데 거짓말 안 하고 라면 한 박스씩 매일 왔었어요. 저를 만나게 해달라는 팬이 집으로 찾아온 적도 있고 결혼해달라는 분도 있었고…재미있는 일화들이 있었죠. 그런 관심이 처음엔 부담스러웠지만 그만큼 저를 아낀다는 말이니까 나중에는 큰 원동력이 됐어요. 그 기쁨을 알기 때문에 제가 아직까지 여자농구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은퇴 후 농구 해설가로 변신한 박찬숙. [헤럴드경제DB]

높기만 한 감독 문턱…“여성 지도자 많아져야”

박찬숙은 2005년 동아시아대회에서 여성으로는 최초로 여자농구 대표팀 감독직에 올랐다. 이후 정미라가 2006년 존스컵과 2009년 동아시아대회 지휘봉을 잡은 일이 있으나 친선전 성격이 강한 대회에서 한정된 임시 감독이라는 성격이 짙었다. 박찬숙은 “정책적으로라도 체육계의 여성 지도자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여자농구 대표팀을 맡은 여성 지도자가 없었어요. 여자팀에 여자 감독이 없다는 게 화가 나더라고요. 여성 지도자도 대표팀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죠. 여자프로농구팀에서도 감독직을 이어나가고 싶었지만 안된대요. 여자는 약하대요. 시켜보지도 않고 해보지도 않고 그런 선입견으로 평가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많이 싸웠죠.”

지금까지 WKBL에서 여성이 정식 감독을 맡은 것은 2012년 KDB생명 위너스를 이끈 이옥자 감독과 현재 부산 BNK 썸을 이끄는 유영주 감독이 유일하다. 이 가운데 지난 3월 대한민국농구협회는 “도쿄올림픽 본선 여자농구 대표팀 감독 지원자 면접을 실시한 결과 최종 후보로 전주원 우리은행 코치와 정선민 신한은행 전 코치가 선정됐다”고 밝혔다. 2명의 여성 후보가 최종 감독 후보군으로 추려지면서 한국 여자농구 대표팀은 사상 최초로 여성 사령탑을 배출하게 됐다. 박찬숙은 “대표팀 여자 감독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면서 “좋은 결과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끝으로 그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각오를 다졌다.

“운동을 시작해서 마무리할 때까지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행복했었어요. 은퇴하고 사회에 나오니까 그 많은 길이 다 험하더라고요. 그때 깨달은 게 ‘아 나는 농구와 함께할 때 가장 행복하구나’라는 거예요. 이젠 ‘옛날에 유명했던 박찬숙’이 아니라 ‘여자농구에 없으면 안 되는 박찬숙’이 되고 싶어요. 여자농구의 길을 잘 닦아서 제2의 여자농구 황금기를 이끌어봐야죠.”

정지은 기자/jungj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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