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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견은 사절…‘에스메 콰르텟’이에요
백인 남성 중심 보수적 ‘콰르텟’
여성 현악 4중주단은 신선한 파격
2018년 최고 권위 콩쿠르서 우승
한국 첫 獨 한스 갈 프라이즈 수상
“콰르텟 3.5세…모든 곡 연주해야죠”
배원희(33·사진 왼쪽부터), 하유나(29), 김지원(28), 허예은(28)로 구성된 에스메 콰르텟은 창단 2년차인 2018년 세계 최고 권위의 런던 위그모어 홀 국제 현악사중주 콩쿠르에서 한국인 실내악단 최초로 우승을 차지하며, 전 세계 클래식계에서 사랑받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마지막 곡을 앞둔 객석에 내려앉은 고요 속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네 사람의 손에 쥔 활이 일제히 첫 음을 기다리는 순간의 마법. “‘죽음과 소녀’를 시작할 때 이게 마지막 곡이라고 생각하니 비장해지는게 있었어요. 빠암~하는데… 오늘 좀 되네? 싶었죠.(웃음)” (배원희·제1바이올린) 완벽했다. 쌍둥이처럼 한 곳을 향해 가는 네 사람의 호흡은 ‘명불허전’이었다. “첫 코드부터 모든 걸 쏟아 부었어요”(허예은·첼로), “네 명 모두 비장했어요.”(김지원·비올라)

성공적인 데뷔 무대였다. 잃어버린 봄을 찾아준 모차르트부터 세계적인 현대 음악가 진은숙, 아일랜드 민요 ‘런던데리의 노래’에서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14번으로 이어진 다채로운 구성은 에스메 콰르텟의 화려한 신고식이었다. 빈틈없는 합주와 기승전결을 갖춘 스토리텔링으로 채워진 무대는 객석에 짜릿한 희열과 벅찬 감동까지 안겼다. 최근 국내에서의 단독 데뷔 무대를 마친 현악 4중주단 에스메 콰르텟을 만났다.

“너무나 기다려온 고국에서의 연주였어요. 이렇게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실 줄 몰랐는데, 공연을 한다는 것 자체가 감격이었죠. 잔기침 소리조차 안 나는 관중의 성숙한 분위기 속에서 음악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어요.”(배원희)

여성 현악 4중주단의 등장은 국내외에서 신선한 파격으로 비쳤다. 시작은 리더 배원희의 제안이었다. “우리 콰르텟 한 번 해볼래?”

“아직도 그날이 기억나요. 학교에서 탁구를 치고 있는데 언니가 전화를 걸어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생각할 필요도 없었어요. 언니의 말에 무조건 믿음이 갔어요.”(허예은) “낚였어.(웃음)”(배원희) 당시 프랑스에 있던 하유나(제2바이올린)는 배원희의 전화를 받고 일주일 만에 독일로 날아왔다. “졸업 시즌이었는데 특별히 할 일이 없었어요. (웃음) 진로에 대한 고민도 있었고요.”(하유나) 하유나가 이사 온 2016년 10월 1일이 에스메 콰르텟의 공식 창단일이다. “콰르텟도 좋았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 좋아서 하게 된 결정이었어요. 요즘 젊은 꼰대도 많잖아요. 근데 (원희) 언니는 나이 차이가 난다고 무조건 내 말을 들으라고 하는게 아니라 서로의 의견을 존중해줘요. 사실 저희한테 잡혀 살아요.(웃음)”(하유나)

보수적인 클래식계에서, 백인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콰르텟’으로 전 세계를 호령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2년. ‘시간의 길이’가 쌓일수록, 적어도 5년은 지나야 진짜 ‘콰르텟’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이야기는 에스메 콰르텟 앞에서 구문이 돼버렸다. 창단 직후부터 콩쿠르를 휩쓸더니, 2018년엔 세계 최고 권위의 ‘영국 런던 위그모어홀 국제 현악사중주 콩쿠르’에서 우승. 에스메 콰르텟의 이름 앞에 ‘한국인 최초’의 수사가 등장과 동시에 따라다니게 됐다. 당연히 세계가 주목했다. 최근엔 한국 최초로 독일 한스 갈 프라이즈를 수상했다.

이들에게 따라다니는 성과는 ‘노력의 결과’였다. “사실 모든 콰르텟이 그렇지만, 처음부터 기적처럼 잘 맞는 건 아니에요.”(배원희) “첫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접시 깨지는 소리도 나고…(웃음) 자기 최면이 이뤄낸 4년이었죠.”(하유나) “아무래도 네 명이 다른 교육을 받아오다 보니 연주자로 음악적 해석과 테크닉이 다르고, 소리내는 방법도 달라요. 그래서 하나의 소리로 만들어내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어요.”(배원희) 하루에 4시간씩,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는 근성은 지금의 에스메 콰르텟을 만들었다. “한 가지 목표가 생기면 모두 끈기를 가지고 해요. 단기적으로는 오늘의 소리는 어떤 걸 만들자고 하면 다들 될 때까지 하는 성격이에요.”(허예은) 그러다 운명처럼 완벽해지는 날이 온다. “모든 것이 딱 맞아 완벽한 소리가 날 때, 그때 온몸에 소름이 돋아요. 그게 콰르텟의 매력이더라고요. 근데 사실 연주를 하면서 매번 나진 않아요.(웃음)” (김지원)

네 사람이 모인 것도, 근성을 가지고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 모두에게 현악 4중주의 세계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콰르텟은 사실 피아노 트리오나 다른 실내악 편성에 비해 곡이 많아요. 작곡가들도 가장 이상적인 편성이라고 생각해 많은 곡을 남겼고, 현대 작곡가들도 꾸준히 곡을 쓰고 있어 항상 탐구할 수 있는 매력이 있어요.”(하유나)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가 함께 하다 보니 각각의 악기가 솔로 연주를 할 때 담지 못 하는 풍성한 소리, 혼자로는 역부족인 소리를 채울 수 있는 것도 함께 모였을 때의 장점이다. “바이올린은 아무리 소리를 크게 내려고 해도 베이스가 부족하고, 첼로는 카랑카랑한 소리를 내고 싶을 때 화려한 소리를 못 내잖아요. 그런 소리가 채워졌으면 좋겠다는 판타지가 충족돼요. 그런데 오케스트라와 달리 각자가 돋보일 수 있으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소리의 세계를 펼칠 수 있다는 점이 특별한 것 같아요.” (배원희, 허예은) 하나의 소리를 향해가다 보면, 운명처럼 완벽해지는 날이 온다. “모든 것이 딱 맞아 완벽한 소리가 날 때, 그때 온몸에 소름이 돋아요. 그게 콰르텟의 매력이더라고요. 근데 사실 연주를 하면서 매번 나진 않아요.(웃음)” (김지원)

하나의 소리를 내는 것 만큼 음악을 향한 서로 다른 관점과 해석의 방향을 한 곳으로 두는 것도 중요하다. “그 부분이 사실 가장 어렵고, 콰르텟의 핵심적인 활동이에요.” (허예은) “저희는 억지로 같게 만들기 보다, 각자의 개성을 살리면서 조화롭게 만드는 연습을 해요. 연주를 할 때에도 음표를 전달한다기 보다는 음악 안에서 저희가 만든 이야기, 색깔, 감정을 표현해 우리만의 특별한 연주를 들려 드리려고 하고 있어요.”(배원희)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며 여성 콰르텟이라는 이유로 받게 된 ‘편견의 시선’도 많았다. “여성 연주자는 많지만, 콰르텟은 단체 생활을 해야 하는 특수한 역할이다 보니,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편견이 있었어요.” (배원희) “우승 후 매니지먼트 미팅을 할 때, ‘너넨 얼굴도 반반해서 결혼을 안 할 거 같지도 않은데 계속 할 수 있겠어?’ 이런 질문도 받았어요.”(하유나) “여자 넷이 모였는데 안 싸우냐”는 질문도 단골손님이었다. “머리채라도 잡고 싸울 줄 아나봐요.(웃음)” (허예은) “그럼 내가 진다.”(김지원) 농담처럼 오간 이야기였지만, 편견에 맞설 때에도 에스메 콰르텟은 당당하고, 쿨했다. “왜 안 될 거라고 생각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농담으로 그걸 다 서포트해주는 좋은 남편 만날거라고 답하기도 했고요.” (에스메 콰르텟)

여성 콰르텟이라는 신선함,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실력이 채워진 이들은 콩쿠르 우승자 투어 이후 빠짐없이 모든 곳에서 재초청을 받았다. ‘한 번도 안 들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듣는 사람은 없는’ 무대의 주인공. 이름처럼 ‘사랑받는’(프랑스 고어 에스메) 콰르텟으로 커가고 있는 중이다. 코로나19로 유럽 일정은 꽤 많이 취소됐지만, 7월부터 연말까지 다시 현지 일정이 이어진다. 전 세계에게 다섯 팀의 연주자만 초청하는 독일 슐레스빅 홀슈타인 페스티벌의 코로나19 스페셜 에디션에 참석한다. 페스티벌은 취소됐지만, 독일 아르떼 방송을 통해 라이브로 진행된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2주간의 자가 격리를 가진 뒤 국내 팬들과 만나는 시간(클래식 레볼루션)도 기다린다.

콰르텟으로 치면 만 3.5세 밖에 되지 않은 나이라고 한다. “저희가 연주한 곡은 콰르텟의 100분의 일도 안돼요. 아직 그어보지도 않은 곡이 너무나 많아요. 모든 곡들을 한번씩 연주해봐야죠.”(배원희) “3년에 100분의 1이면 300년 살아야해.(웃음)”(허예은) “그 시간 동안 저희만의 색깔이 있는 콰르텟으로, 에스메 콰르텟이라는 브랜드로 남고 싶어요. 그리고 한국인 여성 콰르텟이 아닌 오로지 ‘에스메 콰르텟’이라고 기억되고 싶고요.” (에스메 콰르텟) 고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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