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익활동 없이 후원금만으로 사회 약자 도와
염전노예 사건 공론화, 국가 배상책임 인정받아
정신질환 강제입원제도 헌법불합치 결정 이끌어
“차별금지법 필요…단정 말고 협의 도출 중요”
“먹고 살면 된다는 인식 전근대적, 2차 욕구 당연”
“분리 계속되면 편견·혐오 키워…함께 어울리는 게 인간”
염형국 변호사가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사무실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하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염 변호사는 우리나라 공익전담 변호사 1세대로 꼽힌다. 박해묵 기자 |
[헤럴드경제=좌영길·박상현 기자] #지난해 9월, 경기도 한 공장에서 일하던 A씨는 엄지손가락이 기계에 말려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구급차를 타고 봉합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찾았지만, 20여군데에서 진료를 거부했다. A씨가 HIV바이러스 보균자였기 때문이다. 겨우 진료를 해주겠다는 병원을 찾은 때는 사고 이후 13시간이 지나서였다. A씨는 결국 평생 손가락을 구부리지 못하는 장애를 안고 살게 됐다. 일반인들이야 ‘에이즈’에 대한 편견을 가질 수도 있지만 의료진까지 진료거부 조치를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A씨는 병원에서 대기할 때도 의자에 앉지 못하고 맨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주저앉아야 했다. HIV바이러스는 신체접촉으로 감염되지 않는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염형국(47·사법연수원 33기) 변호사는 사람들로부터 지지받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대신하는 일을 전담한다. 해외에선 HIV보균자는 장애인으로 인정하고, 불합리한 차별을 받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둔 나라들이 많지만 국내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염 변호사는 HIV 감염인들을 장애인으로 인정하고, 불합리한 차별을 금지하도록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공감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익인권법재단이다. 영리활동을 하지 않고, 상주하는 변호사가 장애인, 성소수자, 빈곤계층, 이주민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소송구조 활동과 자문을 한다. 염 변호사가 창립을 주도한 공감은 2004년부터 17년간 불합리한 차별 관행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4년 공분을 일으켰던 ‘신안 염전노예사건’, 2016년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정신병원 강제입원 제도 문제제기도 공감이 소송업무를 수행했다.
전직 대법관과 검찰총장, 특별검사 등 고위직 법조인들이 부동산 사업 과정에서 거액을 직·간접적으로 수수한 사실이 드러나며 법조 불신이 커지는 상황에서도 공감은 묵묵히 우리 사회에서 소외받는 이들을 위해 일한다. 우리나라 ‘공익전담 변호사 1호’인 염 변호사를 서울 종로구 공감 사무실에서 만났다.
박해묵 기자 |
2004년 공감을 창립한 염 변호사는 스스로를 “운이 되게 좋았던 것 같다”고 말한다. 어렸을 때 외교관을 꿈꿨지만, 오히려 늦깎이로 카투사에 입대해보니 외국어 실력이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회사원보다 활동적인 일을 하고 싶었고, 결국 준비한 게 사법시험이었다. “사법연수원에 입소해서 2003년에 2년차가 됐는데, 뭐라도 밥벌이를 해야 하잖아요. 그냥 앉아서 하는 정적인 직업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로펌이나 일반 개업변호사를 하면 의뢰인이 맡기는 사건을 하는 거잖아요. 물론 그것도 의미가 있지만 공익단체에 가서 일을 하면 변호사가 할 일이 많겠구나 생각했죠.” 무턱대고 찾아간 곳이 ‘아름다운재단’ 이었다. 때마침 익명의 독지가가 참여연대를 통해 공익변호사 기금 5000만원을 기부한 시기였다. 재단도 때맞춰 찾아온 변호사를 반겼다. 재단은 곧바로 사법연수원에 공고를 냈고, 소라미·김영수·정정훈 변호사가 같이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우리나라 1호 공익법단체 공감의 시작이었다.
지금이야 각종 사회 단체에서 공감의 존재를 알기 때문에 먼저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제보도 들어오지만, 설립 초기엔 당연히 찾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에는 궁리를 했죠. 다들 시민단체 자원활동 경험도 없었어요. 그래서 조그만 단체들이 변호사를 필요로 할 때, 자문이건 소송이건 일단 파견을 가서 일을 해보자고 했어요. 공감 변호사 중 한 분은 사회복지쪽, 한 분은 이주민, 여성은 소라미 변호사, 남은 게 장애인 밖에 없었고 제가 나가게 된 거죠.”
평소 장애인 문제에 관심이 많거나, 가족 중 장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턱대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파견을 나가니, 휠체어를 타고 몸도 뒤틀려 의사소통이 쉽지 않은 장애인들을 직접 대면했다. 염 변호사에겐 익숙치 않은 경험이었다. “같이 지내는 게 좀 생소하기도 하고 솔직히 겁이 나기도 했어요. 어떻게 소통하고, 어떻게 같이 일하지, 그런 마음이 들었는데 1~2주 나가보니까 그냥 똑같더라고요. 소통이 어려운 분도 있었지만, 몇 달 지나니 말도 알아들었죠. 몸으로 느끼면서 일을 하게 된 거에요.” 일을 하며 경험이 쌓이다 보니 지금은 장애인 인권 분야 전문가로 인정받는다. 염 변호사는 이러한 경험을 들어 장애인 분리를 해소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특수학교, 특수시설을 계속 별도로 하니까 사람들이 장애인 문제에 대해 상상으로 편견과 혐오 키우고 그게 쌓이는 거죠. 그러다 보니 장애인 학교, 시설을 지역사회에서 안 된다고 하게 되고요.”
박해묵 기자 |
2014년, 전남 신안군에서 벌어진 이른바 ‘염전노예 사건’은 사실관계도 참혹했지만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사례였다. “지적장애와 시각장애가 있는 분이, 엄마에게 편지를 썼어요. 염전주 몰래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부쳤죠. 그냥 경찰이 오면 안 되고, 소금사러 온 사람으로 변장해서 와야 한다고 썼죠. 실제로 광역수사대에서 염전 사람으로 위장해서 찾아갔어요. 아무래도 전남 지역에 인프라가 부족하다 보니, 서울에서 많이 내려가서 면담도 하고 구출도 했죠.” 염 변호사는 서울에 머물면서 소송구조와 법률대리 업무를 맡았다. 각계의 노력이 이어지면서 편지를 보낸 장애인 말고도 수십 명이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는 착취를 당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났다.
염 변호사는 사건이 알려진 이후에도 지원을 맡아 피해자 8명을 대리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3년이 걸린 끝에 항소심에서 국가배상책임을 인정받았다. 1심 재판을 맡은 판사중 한 명은 “사업주가 돌봐준 게 아니냐”는 말을 법정에서 꺼내기도 했다. “100% 틀린말은 아니에요. 노동력 착취사건에 대해 검찰이나 경찰이 사용자를 중심으로 판단을 하고 결정을 하기 때문에 불기소 처분이 많이 나옵니다. 검사나 판사도 인식 자체가 이 사람들은 부모가 버린 사람,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부모가 아예 신체 위임각서를 써주기도 해요. 부모가 그럴 권한도 없고, 법적 효력도 없는데 민형사 문제제기 안하고 먹여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된다, 이런 얘기가 통용되고 유효하다는 판단을 받아요. 범죄의 경중을 따질 때 취약한 피해자의 상황을 이용한 걸 가중처벌해야 하는데, 오히려 감경 요인이 되기도 하죠.”
소수자 문제는 시대와 환경 변화에 따라 접근방법이 달라진다. 최근에는 영화관에서 장애인들을 위한 자막을 준비하지 않는다거나, 놀이기구 탑승하는 문제를 놓고 법적인 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사실 우리 사회가 과거 60~70년대는 못 먹고 못 살았어요. 먹고 사는 게 지상 최대 과제인데, 50년 사이 급작스럽게 경제 선진국이 됐죠. 인간은 1차적 욕구가 만족되면 2차, 3차 욕구가 발현되기 마련입니다. 교육받고 싶고, 자아를 실현하고 문화를 향유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장애인도 극장에 가고, 뮤지컬을 볼 수 있어야 하죠. 그런데 장애인은 ‘먹여주고 재워주면 됐지 굳이’ 하는 전근대적 인식이 남아 있어요. 장애를 가지고 싶어서 가지는 게 아니잖아요. 특권이 아니라 모두가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를 배제하는 게 바로 차별이죠.” 정신장애인은 장애인 중에서도 또 분리되고 차별받는 존재다. 정신질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킨다. 염 변호사는 그저 먹여주고 재워주면 된다는 제도에 문제를 제기했고, 헌법재판소도 이 문제에 대해 공개변론을 열고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 변호사는 우리 사회 변화가 긍정적이라고 말한다. “영역별로 좀 다르지만, 장애인 차별 문제는 확실히 개선됐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마음 속으론 싫어하고, 혐오하는 감정이 있을지 몰라도 대놓고 차별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사례는 많이 줄었습니다. 차별을 금지하는 제도가 만들어지고, 장애인들이 사회활동도 많이 하게 됐죠. 안보일 땐 막연히 두려워하고 혐오하는데, 막상 겪어보면 같은 사람이에요. 오히려 난민이나 특히 성소수자 문제는 아직도 주류적인 시각에선 사람들을 배제하고 격리, 차별하죠. 같이 살아갈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고요.” 최근 공감에서는 대구 이슬람 사원 설립 문제도 검토 중이다. “엄밀히 따지면 이슬람은 세계 4대 종교에요.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만 곤경을 겪고 있죠. 대책위까지 꾸려서 데모도 하고요. 혐오와 편견 많이 남아 있다 생각이 듭니다.”
염 변호사는 오히려 기업은 사회 변화에 빠르게 발을 맞춘다고 평가한다. “기업은 시장논리로 움직이다 보니까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저는 생소한 용어인데도 이미 보편화되고 로펌들도 많이 지원하고 있더라고요. 시장논리이긴 하지만 필요한 일이잖아요. 기업과 자본은 빠르게 대처하고 있는데, 정작 공공·비영리 영역에선 못 좇아가고 있어요.” 지적장애를 겪는 사람이 한번 한정후견 대상으로 지정되면 직업이 제한되는 제도도 마찬가지다. 염 변호사는 후견지정으로 인해 사회복지사 일을 할 수 없는 장애인을 대리해 행정소송을 내고 위헌법률심판제청을 냈다.
공감은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100% 후원금으로 운영되지만, 다행히 코로나19 확산 시국에서도 지원금이 급감하진 않았다. 비영리단체로서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발을 내딛었지만, 한계도 있다. 개별사건을 해결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입법을 통한 제도 개선이다. 차별금지법이나 인권교육법은 아직도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합리적인 중용이 좀 더 필요합니다. 국가정책도 마찬가지에요. 너는 악이고, 나는 선이다 이렇게 대립하다 보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정쟁만 하고 끝납니다. 공감대가 있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할거에요. 차별금지법도 마찬가지에요. 상대방을 혐오주의라고 하기보다 협의를 도출하고 한발짝, 반발짝이라도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염 변호사는 법무부 인권국장이나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후보에도 물망에 올랐지만 아쉽게 지명은 되지 못했다.
염 변호사는 ‘공익 변호사 1호’라는 평가가 과분하다고 말한다. 변호사 3만명 시대에, 영리성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 것도 당연한 현상이고 부정적으로 평가하진 않는다. 다만 법정에서 의뢰인을 대변할 수 있는 역할을 독점하고 있는 것은 변호사의 특권이고,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일을 할 수 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어요. 코로나 상황에서 관계가 소원해지고, 고립되고 1인 가구도 늘어나고 있죠. 하지만 1인가구나 혼자 지내는 사람이라고 해서 관계의 필요성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인간이라는 것도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가 있으니 인간이라고 하는 거잖아요. 관계는 나 스스로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장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원래 사람의 모습은 한 데 어우러져 함께 사는 겁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감수할 줄 아는 자세를 마음에 두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염형국 변호사는 △경희대 법대 △사법연수원 33기 △공인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국가인권위원회 정신장애인전문위원회 전문위원 △ 법무부 장애인차별시정심의위원회 위원 △대한변호사협회 변호사공익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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