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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홍 칼럼] 베트남 수교 30돌, 호찌민 리더십을 생각한다

1945년 9월 2일 오후 2시 베트남 임시정부의 내무장관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이 하노이 바딘광장에 모인 군중에게 연설할 인사를 소개했다. 임시정부 주석 겸 외무장관 호찌민은 자신이 작성하고 사전 독회를 거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생존, 자유, 행복 추구 등이 그러한 권리다.’ 이 불멸의 선언은 1776년 미합중국의 독립선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는 “베트남의 모든 인민은 자유와 독립을 위해 생명과 재산을 희생하겠다고 결의해야 합니다”라고 역설했다. 그러다가 그는 청중 쪽을 바라보며 외쳤다. “나의 동포 여러분, 알아들었습니까?”

느닷없는 물음에 “예!”하는 우렁찬 호응이 터졌다. 호찌민은 1,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예견이라도 한 듯 국민의 희생 결의를 다짐받았다.

호찌민을 베트남인들은 “호 아저씨”로 부른다. 냉혹한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자상한 동네 아저씨처럼 여기는 것이다. 호찌민은 베트남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공산주의를 활용한다는 생각으로 ‘민족통일전선’ 노선을 일관되게 지켰다. 1920년 7월 레닌의 ‘민족 및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가 발표되자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신념을 더욱 강하게 가졌다. 이 당시 레닌은 한국에서 온 여운형, 김규식, 이동휘 등과도 따로 면담하고 독립운동의 방략에 관해 의견을 물었다. 이 중 여운형이 “아직 산업노동자가 취약한 조선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거친 후 2단계로 계급혁명을 도모해야 한다”고 레닌의 견해에 일치한 답을 내놓았다.

1930년 2월 베트남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호찌민이 작성한 강령도 통일전선 내용이었다. 그러나 당시 국제공산주의 지도부 코민테른은 계급투쟁의 강경 노선으로 돌아선 상황이었고 이후 호찌민은 당에서 치열한 비판에 직면했다. 이때 호찌민은 강경파 후배들인 쯔엉찐이나 레주언 등에게 권력투쟁을 벌이지 않고 당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그로부터 불과 4~5년 후 일본 군국주의와 독일 나치정권이 등장하자 코민테른은 반파쇼 통일전선 전략으로 다시 전환한다. 호찌민 노선은 재평가받고 지도력도 회복된다. 정부 수립 후 강경파들이 급진적 토지개혁으로 민심의 반발을 사자 호찌민은 당 총서기 쯔엉찐을 해임했으나 나중에 복권시켰다. 이후 쯔엉찐이 1986년 당서기장인 응우옌 반린과 함께 개혁개방정책 ‘도이머이’를 주도하게 된다. 이처럼 호찌민은 당내에서 비판을 주고받으면서도 숙청과 같은 냉혹한 권력투쟁을 하지 않았다. 불변의 원칙은 지키되 이념과 규범보다 실용과 현실을 중시했다. 호찌민 평전으로 권위 있는 윌리엄 듀이커는 그의 리더십에 대해 ‘레닌과 간디의 융합’이라고 평가했다.

베트남은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못지않게 우리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나라다. 우리의 주요 대외정책인 신남방정책의 핵심 파트너다. 올해는 특히 양국 수교30돌이어서 다양한 기념사업들이 펼쳐지는 분위기다.

코로나 발호 전인 2017년 한국인의 베트남 방문객은 241만5000여명으로 베트남의 외국인 방문객 순위 1위였다. 반대로 같은 해 베트남인의 한국 방문객은 32만4700여명이었다. 베트남에는 삼성, 현대, LG, 대우건설을 위시해서 한국의 크고 작은 기업 9300여개가 활동하고 있다. 이들의 해외 수출물량은 베트남 수출 총량의 30% 이상을 차지한다. 베트남의 외국 교역량은 중국-미국-한국-일본의 순이다.

한국 기업들은 베트남 정부가 처음처럼 지원역할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불만이다. 베트남 측은 한국 기업이 부속품 등의 공급망에 베트남 기업들을 더 많이 참여시키기를 바라고 있다. 양측은 수교30돌을 맞아 이런 상호 요구사항들을 소화해서 지속적 발전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서울미디어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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