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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부는 기업대출 늘리라지만…은행은 “대출 안된다”는 말만
신용위험 경계감에 높아진 은행 문턱
당국, 건전성 강화·시장안정 지원 요구
은행, 대출심사 강화…승인거절도 늘어
지점장들 “기업 만나도 할 말이 없어”

# 최근 한 중소화학업체는 은행 대출을 받으려다 여신 승인 보류 판정을 받았다. 금리를 얹어줘야 하는 회사채는 발행을 포기했고, 그나마 조달이 가능한 대출로 눈길을 돌린 터였다. 장기간 거래하던 곳인 만큼 무난히 대출이 나올 거라 예상했지만 은행은 돌연 추가 서류를 요구했다. 해당 업체 최고재무책임자(CFO)는 “대출을 받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별 따기”라며 “옛날에는 찾지도 않던 부동산 담보 등의 증명서류를 첨부하라는 요구를 받는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 시화공단에 있는 한 시중은행의 A지점장은 최근 들어 일정이 한가해졌다. 평소라면 연말 실적을 맞추고자 기업 경영진과 재무담당자를 만나느라 바빴을 테지만 올해는 찾는 사람이 없었다. A지점장은 “금리 급등에 채권시장마저 경색되면서 대출을 받으러 오는 기업도 없고, 승인이 빡빡해진 탓에 먼저 대출을 제안할 수도 없다”며 “내년 대출 성과평가지표(KPI) 채우는 것이 벌써 고민”이라고 하소연했다.

▶금융권에 SOS 호출한 당국, 대출 늘리라면서 건전성은 조여=금리 급등과 레고랜드 채무불이행 사태로, 이른바 ‘돈맥경화’ 사태가 터지자 금융당국은 먼저 금융권에 손을 뻗었다. 이에 5대 금융지주는 자금시장 완화를 위해 95조원 규모의 유동성 공급을 약속했다. 그러나 금융당국의 취지와 다르게 은행의 기업대출 문턱은 낮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기업들의 경영 전망이 점차 어두워지면서 은행들도 건전성과 자금 공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딜레마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실제 회사채 발행 여건이 악화됨에 따라 기업들은 꾸준히 은행 문을 두드리고 있다. 지난 4일 기준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기업대출 잔액은 704조6366억원으로, 9월 말(694조8990억원)에 비해 약 9조7376억원 증가했다.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에 10조원가량 뛰었는데 9월 증가액(7조4726억원)과 8월 증가액(5조7595억원)을 비교했을 때 오름세가 확연하다.

그러나 꾸준한 수요에도 은행들은 무작정 대출을 늘려줄 수 없는 상황이다. 금융당국이 시장 안정 기능을 요구하는 동시에 금융사들의 자본건전성도 조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은행들에 남은 선택지는 우량 기업만을 골라 취급하는, 대출 ‘체리피커(Cherry Picker)’가 되는 것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자금 필요한 곳에는 문턱 ‘더’ 높이는 은행=실제로 신용위험에 대한 경계감이 커지면서 은행의 기업 대출 문턱이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지난달 한국은행이 204개 금융기관 여신총괄 책임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금융기관 대출행태 서베이 결과’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조사에 따르면 올 4분기 국내 은행의 기업에 대한 대출 태도는 전반적으로 강화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됐다. 대기업의 경우 -3으로 전분기(-6) 대비 다소 완화됐지만 중소기업은 -3으로 전분기와 동일했다.

지수가 마이너스를 보이면 대출 태도를 강화하겠다고 답한 금융기관이 많다는 의미다.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 실적 부진과 취약기업의 재무건전성 악화 등으로 신용위험에 대한 경계감이 커지고 있는 만큼 대출 경계감이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실제 은행들은 최근 기업대출 장벽을 더 촘촘히 쌓고 있다. 유동성 공급을 약속한 탓에 공식적인 지침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내부에서는 이미 신규 대출을 자제하는 방향으로 기조를 튼 모습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공식적인 지침은 없었다고 해도 영업점에서는 이미 신규 여신을 관리하는 등 건전성 유지에 주력하고 있다”며 “담보나 대표자 신용도 등 조건을 더 엄격히 보는 등의 보수적인 분위기가 이미 형성됐다”고 말했다.

영업점 차원에서도 기업대출의 부실을 관리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보인다. 남대문시장 인근 은행 영업점 직원 A씨는 “최근 건전성 관리 측면에서 영업점들의 부담이 커져 연체관리와 신규 여신 취급을 더 엄격히 하고 있다”며 “평소 거래실적이 탄탄해 쉽게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고객이라고 하더라도 더 꼼꼼히 신용도를 확인하는 등 분위기 변화가 크다”고 말했다.

이는 비단 은행에만 적용되는 얘기가 아니다. 2금융권에서도 금리상승에 따라 자금 조달비용이 올라가며 기업대출에 보수적인 태도가 확산되고 있다. 규제상 채권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이 불가능한 저축은행은 수신을 통해 자금을 충당해야 한다. 이에 최근 저축은행들은 앞다퉈 고금리 예·적금상품을 선보이며 자금 확보에 나섰다. 물론 지금과 같은 출혈경쟁은 자금 조달비용을 상승시켜 대출금리를 끌어올리는 악순환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금리인상에 한계기업 증가도 우려…“이미 이자비용 임계치 넘어”=무작정 금융권의 대출 기조를 탓하기도 어렵다. 늘어나는 기업대출 잔액과 함께 추가 금리인상도 예고되며 부실 우려가 가시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의 관점에서 보면, 현 상황에서의 엄격한 대출관리는 부실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합리적인 조치다. 실제로 기업의 경영상황은 벼랑 끝에 몰렸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0월 기업경기실사지수(BSI)는 76으로 집계돼, 2021년 2월(76) 이후 1년8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주요국 금리인상에 의한 경기둔화 우려, 고물가·고환율에 따른 수익성 악화 등이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한계기업이 늘어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지난 9월 한국은행은 경기둔화, 대출금리 상승 등 경영 여건이 계속 악화될 경우 지난해 14.9%였던 한계기업 비중이 올해 18.6%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예측했다. 서정은·김광우 기자

luck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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