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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혜림의 현장에서] 해외 큰손들이 국민연금을 패싱한 이유

“Not Today(오늘은 아닙니다).” 최근 한국을 찾은 글로벌 ‘큰손’에게 국내 연기금 고위 관계자가 “국민연금을 만나냐”고 묻자 돌아온 답변이다. 전주에 내려가려면 하루를 비워야 해서다. 세계 10대 연기금 중 본부가 수도나 금융중심지가 아닌 지역에 있는 건 한국의 국민연금과 네덜란드 의료인연금(PFZW)뿐. 이른바 ‘몸멀맘멀(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의 장면이다.

의결권 자문사인 서스틴베스트의 류영재 대표는 지난달 간담회에서 이런 일화도 소개했다. “친한 외국 투자자가 네덜란드 연금투자회사 APG는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300m만 가면 있는데 국민연금은 인천공항에서 300km를 가도 안 다 온다고 푸념했다.”

900조가 넘는 노후자금을 굴리는 국민연금 패싱은 결코 간단치 않은 문제다. 자본시장에선 작은 ‘정보’가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판매자와 구매자는 잦은 물밑접촉으로 서로의 ‘신용’을 확인하고 거래한다. 각자의 ‘정보 네트워크’를 활용해 어떤 게 좋은 매물인지 판매사가 믿을 만한 곳인지 등 치열하게 검증한다. 어쩌면 자본시장이야말로 ‘몸멀맘멀’이 뚜렷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치는 국민연금을 투자기관으로 안 보는 모양이다. 법을 바꿔 전주로 이전 시킨 이후 국민연금은 우수 운용인력이 빠져나가고 충원 어려움도 겪고 있다. “그래도 신입은 전주 근무인 걸 알고 입사하니”라고 한 고위 관계자의 말이 씁쓸하게 들리는 건 ‘각오’하고 입사하는 풍경이 그려져서일까. 혹시라도 주니어 운용역의 퇴사가 빨라진다면 이유는 명백할 거다. 가령 ‘3년만 버텨보자.’

최근 불거진 운용역 성과급 개편 논란도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다. 성과보상 체계가 퇴사를 막는 근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 서울행은 연차와 직급을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아무리 자부심을 가진 운용역일지라도 자녀교육 앞에선 부모가 된다. ‘운용역 퇴사 현황’은 국정감사 시즌 때마다 국회가 요구하는 단골메뉴다.

공공기관의 지방이전 자체를 반대한다는 게 아니다. 다만, 성격을 고려해 논의하자는 것이다. 지방 이전한 공공기관들의 특징을 보면 한국전력과 같이 독점 지위를 누리거나 비교적 자체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성격의 기관들이다. 하지만 투자기관은 다르다. 이들이 경쟁하는 대상은 민간 그리고 글로벌 시장참여자들이다. 철저히 시장플레이어들과 경쟁하고 호흡하는 공간에 놓일 필요가 있다. 최소한 ‘기금운용본부’에 한해서 서울사무소로 이전하자는 논의를 이제는 시작해야 한다.

최근 한국투자공사를 놓고 힘 겨루기하는 풍경 역시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호남을 텃밭으로 둔 민주당 의원은 전주 이전 법안을 내놓더니 부산지역에선 ‘우리가 제격’이라고 맞붙었다. “국민연금 상황 고려해 논의된 건가”고 묻자 한 보좌관은 “내년 선거잖아요”라고 한다. 하기야 진짜 수익률 제고를 최우선과제로 삼는다면 사실 ‘서울 본부’를 고집할 필요가 없겠다. 가뜩이나 해외사무소 인력도 적은데 샌프란시스코나 뉴욕이 낫지 않겠는가. 정치가 지방과 수도권 갈등을 부추길 게 아니라면 말이다.

forest@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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